서늘하게 스며드는 불안과 고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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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1, 2023

글 김연우

Interview with_ 양유연(Yooyun Yang)_TB 2023 초청 작가

국내에서 묵묵히 활동해온 양유연(b.1985) 작가가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계기는 작년에 개최된 제58회 카네기 인터내셔널이다. 카네기 인터내셔널은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최장의 역사를 지닌 국제 전시로 3~4년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 미술관에서 진행된다. 2018년에 열린 제57회 카네기 인터내셔널에는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과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수상한 임흥순 작가가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름진 흰색 옷가지로 보이는 무언가,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빛이 내리쬐는 풍경, 확대되어 나타난 팔과 손 등으로 이루어진 모호하고 신비로운 양유연의 이미지에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해외 갤러리의 러브콜이 갑작스레 몰려들면서 작가는 미국과 영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포함해 올해만 세 차례 개인전을 치렀다. 서울 부암동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로스앤젤레스 나이트 갤러리, 전속 계약을 체결한 런던의 스티븐 프리드먼 갤러리 개인전, 그리고 프리즈 서울까지. 잠깐 숨을 돌리면서 이제는 11월 중순 개막하는 타이베이 비엔날레를 앞두고 있는 양유연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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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순간들이 빚어내는 ‘자메뷔’
올해 타이베이 비엔날레의 주제인 ‘Small World’와 양유연 작가의 작업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회라는 커다란 공동체에서 고립되어 형성되는 개인의 ‘작은 세상’은 그간 작가가 꾸준히 다뤄온 ‘불안의 시대’와 맞닿아 있는 소재 아니던가. 양유연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법한 고독과 불안의 정서를 차분하고 절제된 페인팅으로 담아낸다. 작가에 의해 여과됨으로써 서늘한 정수(精髓)만 남은 감정은 주변의 인물 혹은 사물의 모습을 빌려 표현되어,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자메뷔(jamais vu, 未視感)의 풍경을 선사한다. 장소성이 제거된 공간, 흐릿하고 불분명한 경계, 흠집이 난 건물, 명확하지 않은 물체, 흔들리는 눈동자…. 그림 속 대상은 한결같이 불완전한 형태이거나 불안정한 상태를 띤다. 어떤 찰나를 포착한 듯한 이미지에서 상황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익숙한 대상을 덤덤하게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어딘가 비뚤어진 각도와 흔들린 초점을 취한다. 대부분은 작가가 촬영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나 주변 풍경, 지인의 사진을 크롭트하고 확대해 그린 그림이지만, 이들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인물을 그릴 때 의식적으로 대상을 닮지 않게 그려요. 인물이 누구인지보다 그가 어떠한 감정을 지니고 있고, 그 정서가 어떤지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하거든요. 사실 초창기부터 자화상을 꾸준히 그려왔는데, 그때 완성한 작업에서는 제 얼굴이 좀 더 잘 보이는 반면 지금은 익명성이 좀 더 부각되는 것 같아요. 같은 방식이어도 초창기엔 묘사에 더 집중했다면, 지금은 왜 이 이미지를 그림 주제로 선택했는지 계속 고민하며 작업해요. 이처럼 개념이 달라지니 결과물도 달라지더라고요.”
옅은 안개가 낀 듯 모호하고 불안한 공기가 감도는 고유의 질감은 동양화의 전통 재료인 장지와 아크릴의 조합에서 비롯되었다. 물감이 은은하게 종이에 흡수되도록 하는 장지는 서서히 퍼져가는 빛과 어둠의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한번 손댄 붓 자국은 수정이 어렵고, 고스란히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여러 겹의 색깔층을 쌓아나가면서도 탁해지지 않도록 작가가 선택한 재료는 아크릴이다. “원래 전통 분채를 사용했다가 2011년을 기점으로 온전히 아크릴물감만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분채는 가루 안료라 점착액으로 아교를 계속 섞어야 하는데, 아교 비중이 높아지면 그림이 점점 뿌예져요. 발색이나 결과물을 보았을 때 아크릴이 더 적합하다고 느껴졌어요.” 아크릴 특유의 고무 재질과 광택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많은 양의 물을 섞어 아주 연한 농도로 희석해 중첩하면 번들거리지 않으면서도 단단하고 부드러운 표면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다. 빛을 튕겨내는 유화와 달리 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고 차분한 질감은 절제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적절했다. 한번 물감을 올리고 나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연한 물감의 층이 쌓여가며 밀도를 더하는 과정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고 있는 순간의 감정이 점점 짙어지는 모양새와 닮았다. “표면이 매끈하고 빛나게 표현되는 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특히 빛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최대한 그런 느낌을 지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단순히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라기보다는 같은 빛과 그림자여도 각각의 발색과 투명도, 대비감을 섬세하게 계산하면서 작업하려고 해요.” 작가는 이를 ‘색을 덧칠해나가는 과정’에서 ‘색을 찾아내려는 노력’으로의 변화라 말한다. 때로는 섬세하게 대상을 어루만지는 유약한 빛줄기로, 때로는 강렬하게 대상을 가리거나 비추는 극적인 연출로. 자유자재로 빛의 강도를 조절하며 완성된 그림은 더욱 명상적으로 다가온다.
올 들어 여러 전시를 동시에 준비하며 힘든 점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작가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몇몇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다행히(?) 이번 비엔날레 출품작은 구작 위주로 구성되어 아쉬움 대신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타이베이 비엔날레에서 만나볼 수 있는 양유연의 작품은 최근의 작업과 결을 같이하는 ‘검열’(2021)을 제외하고는 모두 2012년부터 2015년까지의 작업으로, 개인적 감정보다 자신이 속한 사회·정치적 환경에 조금 더 집중한 시기였다. 무너져가는 건물을 짓누르는 커다란 구체나 첨탑에 걸려 있는 비현실적인 크기의 달처럼,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풍경화로 보다 직접적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담아내고자 했다. “최근 세 번의 전시에서 감성적인 뉘앙스의 인물화를 주로 선보였기 때문에,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조금 다른 성향의 작업을 해외에서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작 본인은 전시 준비로 작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아직은 별다른 변화를 실감하지 못했다는 양유연. 갤러리와의 계약도, 해외 전시도, 모든 게 새롭기에 그저 계속 배우는 중이라는 수줍고도 담담한 소회를 밝히는 그녀가 앞으로 작업을 통해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그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깊은 울림을 선사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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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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