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문화는 왜 미술관으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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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02, 2015

글 이소영(<사진 미술에 중독되다>, <서울, 그 카페 좋더라> 저자)

심오하고 고귀한 예술 작품만 미술관에 전시되는 시대는 갔다. 현대의 유명 미술관에서는 코카 콜라 병과 아이돌 가수의 사진, 주말 드라마를 전시한다. 대중매체가 대량생산한 대중문화가 국내외 미술관의 초대를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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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5일 오전 10시는 미술관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날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미국 LA 카운티 미술관에서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영상 작품 ‘시계(The Clock)’를 24시간 동안 상영했기 때문이다. ‘시계’는 2010년 런던 화이트 큐브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인데, 영화와 텔레비전에 시계가 나오는 장면을 모아서 편집해 ‘24시간’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관람객이 미술관에서 보고 있는 시간과 똑같은 시간에 영상이 흐르는 형식이라 재미있다. 총 5천 편의 세계 영화 속 시계 장면이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도 포함되어 있다. 멜로, 액션, 스릴러까지 각종 영화 속 크고 작은 시계들이 영화라는 대중문화의 파워와 인간의 희로애락을 절절하게 체감케 한다. 7월 25일은 작품을 이곳에서 처음 선보인 날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품을 다음 날 아침 10시까지 24시간 상영한 것.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이 흥미진진한 작품을 상영한 바 있는데, 리움에서 열린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전시 <소리를 보는 경험>을 통해서다.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또 다른 대표작 ‘전화’를 현재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상설 전시 중이니 직접 관람해보는 것은 어떨까? 1995년에 발표한 ‘전화’는 할리우드 고전 영화에서부터 블록버스터 영화까지 전화 통화하는 장면을 연결한 작품인데, 전화벨 소리에서부터 마지막 신호음까지 사람들이 전화 통화를 주고 받는 것처럼 편집했다. 휴대폰 세대에게는 영화 속 유선 전화로 주고받는 간절한 느낌이 신선하게 느껴질 듯하다. 크리스천 마클레이는 사실 소리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사운드 아티스트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미장센이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24시간을 온전히 집중해 작품을 감상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그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지 않은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www.lacma.org).
우리나라 중견 작가들이 바라본 대중문화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와 드라마가 예술 작품이 되어 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사실은 매우 흐미롭다. 우리나라 중견 미술가들도 매스미디어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아톰과 미키 마우스를 합성한 아토마우스 캐릭터로 유명한 이동기도 최근에는 ‘절충주의’ 시리즈를 통해 드라마 속 이미지를 차용한 회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전시에서 선보인 대형 작품 ‘파워세일’은 야구공, 유람선, 고양이, 가격 할인 전단지 문구, 로봇, 축구공 등의 이미지가 무작위로 섞여 있는데, 매스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복잡한 시각 경험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대중문화의 대표적 요소인 TV와 영화, 신문 등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는 어느 순간 우리 눈에 각인되기 마련이며, 우리는 각각의 이미지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끼게 된다. 이동기 작가는 매스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머릿속에 새겨진 21세기의 이미지란 무엇인지 보여주려 한다(www.galleryhyundai.com). 이동기 작가는 최근 만화가 허영만의 작품 세계를 회고한 <창작의 비밀>전에 허영만의 만화를 오마주한 유화 작품을 최초로 선보이기도 했다(www.huryoungman.co.kr).최근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 <Phantom Footsteps>을 연 함경아 작가는 대중문화 이미지를 이용해 ‘SMS’ 시리즈를 만들었다. 자세히 보면 ‘Are You Lonely, too?”’나 ‘Money Never Sleeps’ 같은 짧은 문구가 숨어 있는 그녀의 작품은 북한의 자수 공예가들이 완성했다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작가는 디지털 작업을 통해 픽셀화한 이미지와 뉴스, 유행가 등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배치한 도안을 북한으로 보낸다. 북한의 공예가들은 도안을 보며 자수를 놓는 과정에서 남한의 대중문화를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며, 결국 남한 작가의 기획과 북한 작가의 노동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이 재미있다. 정연두 작가의 새로운 사진 연작 ‘영화?B 카메라’는 작가가 기억하는 특정 영화 속 한 장면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작품은 두 점의 사진으로 이루어지는데, 작가가 새롭게 연출한 장면의 구성 요소를 개별 촬영한 후 컷아웃 레이어로 재조립한 사진과 이를 무대 세트와 유사하게 재현한 촬영장의 측면 사진이 그것이다. ‘동경 이야기-B 카메라’는 오스 야스지로 감독이 1953년에 제작한 영화 <동경 이야기(Tokyo Story)>의 한 장면을 차용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가족의 모습은 2011년 일본 대지진의 피해 지역인 도시에서 느끼게 된 삶과 가족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보여준다. ‘태극기 휘날리며-B 카메라’는 강제규 감독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영화 속에서 접전을 벌이는 낙동강 전투의 한 장면을 비무장 지대의 세트장에서 촬영해 분단국가의 상반된 시선을 보여준다(www.kukj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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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와 지드래곤의 공통점은?

지금 세계 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을 모으고 있는 전시는 아마도 <데이비드 보위 이즈(David Bowie is)>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13년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서 시작된 팝스타 데이비드 보위에 관한 전시는 시카고 MoCA, 파리 필하모니를 거쳐 현재 멜버른 ACMI에서 전시 중이며, 네덜란드 흐로닝어르 미술관으로 순회할 예정이다. 지난 50년 동안 창조적이고 진보적 혁신자로 활동하며 패션, 사운드, 그래픽, 필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보인 거장의 스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스케치, 스토리보드, 핸드 라이팅, 작사, 세트 디자인, 뮤직 비디오 등으로 구성된 3백여 점의 오브제가 전시된다(www.acmi.net.au).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가수 비욕에 관한 전시 <비욕(Bjo˙˙rk)> 또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8월 2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지드래곤의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는 데이비드 보위와 비욕 전시의 인기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2012년 코엑스에서 열린 SM 엔터테인먼트와 가나아트센터의 전시 <SM 아트 익시비션(Art Exhibition)>에서 자극을 받아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을 소재로 삼아 여러 미술가가 작품이 선보였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 지드래곤의 전시는 YG엔터테인먼트와 서울시립미술관의 철저한 공동 기획으로, 국내외 유명 미술가들이 대거 참여해 볼만한 미술 축제를 완성했다. ‘피스마이너스원(Peaceminusone)’은 지드래곤이 상상하는 세계의 또 다른 이름을 뜻한다. 평화(Peace)로운 유토피아적 세계와 결핍(Minus)된 현실 세계에서의 이상과 현실의 교차점(one)이라는 뜻이다.
아티스트 그룹 패브리커는 지드래곤의 소장품과 뮤직 비디오 소품을 이용해 논픽션 뮤지엄을 선보였다. 아이돌 스타 지드래곤이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 가구 디자이너 장 프루베의 작품을 컬렉션한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 지드래곤이 미술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신곡 ‘베베’를 만들었다고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은 그가 평범한 아이돌은 아니라는 확신을 줄 정도다. 미술가 손동현은 ‘힙합 음악 연대기’를 통해 지드래곤이 좋아하는 힙합 뮤지션을 중심으로 문자도(文字圖) 형식의 동양화를 완성했다.
권오상 작가는 성 미카엘 대천사가 악마와 싸우는 유명한 도상에 지드래곤의 모습을 대입해 선과 악의 이분법이 사회의 이중성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권오상은 유명인의 이미지를 차용한 사진 조각 작품을 여러 번 만들었는데, 이번엔 작은 디테일까지 지드래곤과 직접 의논해 조금 더 밀접한 협업을 시도했다고 한다. “현대미술이 대중문화와 영감을 주고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지드래곤과 빅뱅의 현란한 뮤직비디오를 보고 시각적 차원의 파급력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천장에 운석이 매달린 권오상 작가의 사진 조각 공간은 관람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 작가 마이클 스코긴스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지드래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안녕, 내 친구 지드래곤’을 통해 미지의 세계에서 서로 알아가는 과정을 작품 속에 담았다. 손수 라인을 그려 넣고 바인딩 구멍을 도려내 만든 거대한 노트 위에 현대미술과 대중문화, 미국과 한국, 미술가와 가수라는 거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이는 작품이다.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 전시는 중국 상하이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Shanghai), 싱가포르 등으로 이어질 예정(sema.seoul.go.k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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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와 추파춥스의 현격한 신분 상승

21세기에는 세계 어디에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코카콜라 병도 미술관에 전시된다. 코카콜라의 도시 미국 애틀랜타의 하이 뮤지엄에서 코카콜라 병 탄생 1백 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The Coca-Cola Bottle: An American Icon at 100>가 10월 4일까지 열린다. 앤디 워홀, 칼 라거펠트, 장 폴 고티에, 얀 샤우덱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코카콜라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작품과 미국과 산업사회의 아이콘이 된 코카콜라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미술, 디자인, 사진 작품을 중심으로 코카콜라 병 관련 디자인 제품을 전시한다(www.high.org).
추파춥스 역시 여러 번 미술관에 전시되는 행운을 누렸다.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가 패키지를 디자인한 세계 최고의 막대 사탕다운 행보다. 갤러리 구에서 전시한 유의정 작가의 작품은 추파춥스 엠블럼을 수금 방식으로 제작해 금이 지닌 사회적 가치와 흔한 막대 사탕을 혼합해 극강의 가치를 지니게 했다. 작가는 그릇이나 주전자와 같은 일상용품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박물관에서 감상해야 하는 예술품으로 변모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현대의 브랜드가 미래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코카콜라와 추파춥스 역시 처음 만들어질 때만 해도 자신들이 미술관에서 전시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ww.gallerykoo.com).
패션 디자인 작품이 런웨이가 아니라 미술관에서 선보이는 것도 이제는 특별한 이벤트로 취급받지 않는다. 샤넬, 디올 등 럭셔리 패션 하우스에서는 브랜드의 이름을 걸고 대규모 전시를 선보였으며, 까르띠에, 구찌 등은 자체적으로 뮤지엄을 운영하기도 한다. 대중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전시를 자주 개최한 대림미술관은 12월 31일까지 <헨리 빕스코브-패션과 예술, 경계를 허무는 아티스트>전을 선보인다. 헨리 빕스코브는 파리 패션 위크에서 매년 컬렉션을 발표하는 유일한 덴마크 패션 디자이너로, 이미 뉴욕 현대미술관 PS1, 파리 팔레 드 도쿄, 헬싱키 디자인 뮤지엄 등에서 전시를 선보인 바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은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디자이너입니다. 이제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아티스트라는 호칭이 가벼워져서 그렇게 불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티스트라는 단어는 이제 공허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의미가 되었지요.”
패션과 예술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거리의 모든 패션 스토어들이 예술이 아니듯, 모두 예술가는 아니라고 설명하는 그의 의견에 동감한다. 하지만 일렉트로닉 밴드 트렌트모러의 드러머이자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단 <백조의 호수>, 비욕 주연의 오페라 <메둘라(Medu´lla)>의 의상까지 담당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치는 그의 모습은 아티스트에 다름 아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런웨이 위에 모델이 누워 있던 2007년 S/S 컬렉션 ‘더 빅 샤이니 부비스(The Big Wet Shiny Boobies)’와 2008년 F/W 컬렉션 ‘더 민트 인스티튜트(The Mint Institute)’다. ‘더 빅 샤이니 부비스’는 남자의 꿈이자 어머니 같은 고향을 대변하는 가슴 실루엣의 부드러운 조형물로 연출한 컬렉션으로 당시 2천 명의 관객이 쇼장을 찾았다고 한다. ‘더 민트 인스티튜트’는 ‘민트 컬러’로 시작해 민트를 연상시키는 음악과 구조물, 민트 향기와 민트 맛이 나는 음식으로 확장한 컬렉션으로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그야말로 허물었다 할 수 있다(www.daelimmuseum.org).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서도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전시가 이어지고 있는데, 요절한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에 관련한 <기막힌 아름다움>과 <신발: 즐거움과 고통> 전시(2016년 1월 31일까지)가 그것이다(www.vam.ac.uk).
이렇듯 미술관에서 전시될 수 있는 예술 작품의 정의를 다시 쓰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그것이 비록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심히 창대해지는 드라마틱함까지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것은 귀천을 막론하고 찬사받을 수 있는 21세기가 지속되기를 기대해본다. 가난마저도 예술 작품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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