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살아남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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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 2023

글 심은록 (미술 비평가, 나라지식정보 AI 아트 디렉터) Edited by 고성연

<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展 _대전 헤레디움(HEREDIUM) 
“키퍼의 작업을 어떻게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 7년 전쯤, 프랑스 국립 도서관(BNF)에서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의 <책의 연금술(L’alchimie du livre)> 전시(2015. 10. 20~2016. 2. 7)를 보고 난 뒤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는 필자의 말에 이우환은 이처럼 ‘촌철살인’의 질문을 했다. 수긍할 만한 반응이다. 마치 그리스 비극을 상징하는 3대 작가의 연극을 감상하고 나서 그저 “아름다웠다”고 평한 것과 비슷한 결이 아닐까. 미술가보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이우환은 누구보다 키퍼를 잘 이해하는 작가일 수도 있다. 그의 작품에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숭고함과 처절함, 물질과 정신, 장엄함과 폐허 등의 양의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며, 시를 포함한 ‘아름다운 가상’ 그 자체와의 타협을 완곡하게 거절했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평범한 인간의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기에, 키퍼의 작업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파울 첼란,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시인들의 시(詩)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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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폐허에서도 살아남으리라’
파리에는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 걸친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가르침을 건네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라는 지성의 전당이 있다. 이곳에서 미술가 최초로 예술 창작 석좌 교수로 임명된 이가 바로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다. 그리고 당시 그의 유명한 취임 강연(2010년 12월 2일) 제목이 ‘예술은 폐허에서도 살아남으리라(L’art survivra à ses ruines)’라는 문장이었다. 독일 출신으로 1990년대 초반 프랑스로 이주한 키퍼의 예술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시작됐다. 이 강연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그의 개인전 <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 (2023. 9. 8~2024. 1. 31)가 대전 동구에 자리한 헤레디움(HEREDIUM)에서 열리고 있어서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만주와 조선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설립된 수탈 기관인 (구)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전 지점 건물을 복원해 운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거듭난 헤레디움은 라틴어로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을 지녔다.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된 이 짙은 애환 서린 근대건축 유산을 파괴하기보다 역사성과 공간의 특수성을 잊지 않게 남겨둔 덕에, 쓰라린 폐허 위에 예술의 꽃이 피어나고 있다. 장소성 자체가 키퍼의 작업 철학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전은 헤레디움의 공식 개관전으로 지난해 가을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갤러리인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린 안젤름 키퍼의 전시 <지금 집이 없는 사람>과 연속선상에 있다(올가을 전시도 로팍과의 협업으로 진행됐다). 두 전시에서 키퍼가 공통적으로 사용한 가장 중요한 ‘연금술’ 재료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Herbsttag, 1902)’, ‘가을(Herbst, 1906)’, 그리고 ‘가을의 마지막(Ende des Herbstes, 1920)’이기 때문이다. 이 세 편을 포함한 수많은 시가 그의 영혼 속에 평생 기거해왔으며, 그 가운데 수면 위로 올라온 시들은 이처럼 작품으로 시각화된다. 그래서 키퍼의 연작 ‘지금 집이 없는 사람(Wer jetzt kein Haus hat…, 2016~2022, 이하 ‘집 없는’ 연작)’에는 제목과 동일한 다음 시구가 특유의 글씨체로 적혀 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는다.’


워낙 유명한 이 시를 이전에 흥얼흥얼 읊을 때는 몰랐는데, 오늘 다시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MZ 세대가 떠오른다. 그다음 이어지는 시구는 더욱 아찔하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면서….’


‘집 없는’ 연작은 독일, 프랑스, 한국도 아닌 영국에서 시작됐다. 키퍼는 ‘하이드 파크에 앉아 있었는데, 무언가 ‘펑’ 터지는 섬광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낙엽을 비추는 빛과 그 빛이 만들어내는 색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감동의 끈을 놓치지 않고자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놓았고, 후일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헤레디움에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신작을 포함해 대형 작업 16점을 프랑스에서 직접 수송해 왔는데, 일부 캔버스 뒷면에는 그 당시 찍은 사진도 함께 들어 있었다(전체 전시 작품 수는 17점이다).
2층 전시 공간의 중앙에는 1백18개의 홍토 벽돌로 만든 ‘집(설치 작품)’이 있다. 4면 벽의 일부만 남아 있는 이 집은 짓다가 멈춘 것인지, 아니면 세월에 의해 허물어진 폐허인지 알 수 없다. 허물어진 만큼 그 흔적은 더욱 아련하다. 이 설치물은 대형 회화 작품들로 둘러싸여 있다. 오롯이 집중해보자. 릴케의 시와 그 운율이 그대로 그림으로 시각화되면서 어느새 관람객은 깊어가는 가을 한가운데 놓인다. 비 온 뒤 숲속의 낙엽 냄새가 진하게 느껴지며 후각화된다. 캔버스 위 입체적인 낙엽은 금방이라도 가을바람에 휘날려 날아갈 듯하고,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잎들은 떨어져 관람객의 발 앞으로 굴러올 듯하다. 숲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작품 앞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면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리는 듯 청각화된다.
납: 연금술과 카발라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회화를 비롯해 안젤름 키퍼는 오랫동안 납, 금박, 지푸라기 등의 재료를 사용해 작업해왔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이 세 가지 마티에르가 키퍼의 손에 들어가면 마치 원래는 하나의 본질이었던 듯 고귀하고 비물질적이며, 숭고하게 변모한다. 중세 연금술사들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지만, 그는 은밀한 비법과 주문으로 연금술에 성공했다. 녹인 납을 물감과 섞어서 사용하거나 물감 위에 액체화된 납을 덧바르기도 하고, 일반적인 납 판을 부식시키거나 다른 금속과 섞어서 혹은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은백색의 납은 변색이 잘되고, 융해점이 낮고 유연하기에 키퍼의 작업에 적절한 마티에르다. 아니, 어쩌면 납의 성격 때문에 그의 작업이 그렇게 방향 지워졌을 수도 있다. 이러한 납을 보면, 왜 그렇게 오랜 세기에 걸쳐 연금술사들이 납에서 신비하고 가치 있는 다른 금속이 나올 수 있다고 여겼는지 이해된다. 그만큼 납은 형용하기 어려운 신비, 혼돈, 불안 등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독성이 있고 무거운 납이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물질로 변모하는 걸 보면, 분석심리학 창시자로 통하는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다음과 같은 해석이 연상된다. ‘연금술이란 오염된 물질을 분해와 용해를 통해 그 안의 순수한 실체를 추출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기원’이자 ‘목적’과 상통하는 대목이 아닐까?
키퍼에게 납은 연금술과 카발라(Kabbalah)를 매개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중세까지 납은 황과 함께 금을 만들기 위한 원소로 연금술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인 카발라에서도 중요한 물질이다. 이는 그의 미술적 계보와도 연관된다.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가 바로 그의 선생이었다. 보이스의 영향으로 그는 1970년대 뒤셀도르프 예술원에서 공부할 당시 유대교 신비 철학과 북유럽의 신화적 요소를 끄집어내 이를 2차 세계대전에 접목했다. 당시 독일 미술가들은 나치즘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 양식과 주제를 찾으려 했으나, 키퍼는 나치즘의 실체를 노골적으로 다시 역사의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도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여러 낯선 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문학, 천체물리학, 카발라, 진화론, 연금술, 생물학 등 모든 분야에 똑같이 친숙하다’며, ‘그 어떤 것도 예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예술의 정의는 부재’하나, 그 방식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완벽한 결합’이라는 연금술사 키퍼의 주장이다(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취임 강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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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변곡점에 서서
오늘날 인공지능(AI)의 역량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커지고 있다. ‘시’를 읽고 생성하며 ‘철학’ 논문(빅데이터의 일부)을 읽고 사유하는 AI를 옆에 두고, 인간은 스크린만 쳐다보는 아이러니한 또 다른 ‘폐허’에 직면하고 있다. 결과물보다 더 중요한 인고의 사유 과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2014년 2월 발발한 이래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도, 그 무엇보다 시급한 기후변화 같은 재앙에도 우리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 인류의 영혼이 황폐해지고 있는 것이다. 2007년 파리지앵에게 깊은 감동을 준 안젤름 키퍼의 개인전은 하늘이 보이는 유리 지붕의 파리 그랑 팔레에서 개최됐는데, 제목이 ‘떨어지는 별(Chute d’ètoiles)’이었다. 별이 떨어진다는 건, 아도르노가 주장했던 ‘예술 불가능성’의 시대와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폐허에서 예술이 살아남는 모습을 이번 <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전을 통해 체감하며 희망을 얻는다.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àcs, 헝가리 철학자이자 문예 이론가 )의 저서 <소설의 이론(The Theory of the Novel> 속 문장을 빌리자면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의 지도가 되어주었던 시대’를 상기시키며, 떨어진 별을 주워 올리기 위해 예술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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