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다운’ 것, 태도의 가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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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 2025

글 고성연

“공예가의 예술은 사람과 세계 사이의 끈이다.” _플로렌스 디벨 바틀릿(Florence Dibell Bartl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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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프 서울(Kiaf SEOUL)과 프리즈 서울(Frieze Seoul) 개막을 앞뒤로 온갖 행사가 줄지어 열린 9월 첫째 주를 밀도 높은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간 ‘아트 위크’. 이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던 주간을 수놓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유심히 들여다봤다면, 여러 키워드 중에서 ‘공예(craft)’라는 단어가 은근히 시야에 들어온 이들도 있지 않을까 싶다. 글로벌 디자인 플랫폼인 디자인 마이애미(Design Miami)의 지역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인 시추(In Situ)’ 프로젝트의 첫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되면서 공예 작가를 다수 소개한 기획전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Illuminated: A Spotlight on Korean Design)>(9. 2~14)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이간수문전시장에서 열렸고,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지닌 청주공예비엔날레가 지난 4일 ‘세상 짓기’라는 주제(본전시)로 60일간에 걸친 대장정을 시작했다. ‘키아프리즈’ 주간에 개최된 브랜드 행사 목록을 봐도 ‘로에베 재단 공예상’으로 유명한 브랜드 로에베(매년 전시와 아트 토크를 진행한다)를 비롯해 저명한 공예가 카를로스 페냐피엘(Carlos Peñafiel)의 전시를 서울 한남 플래그십 매장에서 연 르메르 등이 눈에 띄었다. 재단법인 예올이 2022년부터 4년째 한국 공예의 가치를 알리고 증진하기 위해 샤넬과 함께 펼치는 ‘예올×샤넬’ 프로젝트의 올해 전시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에서는 종이(지호장 박갑순)와 금속(이윤정)의 ‘따로 또 같이’식 앙상블이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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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미술관과 갤러리, 브랜드 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성대한 축제의 주간에 들어선 ‘공예의 자리’에 대한 반응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을 듯하다. 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산업사회에, 예술의 상품화, 상품의 예술화가 갈수록 영리하게 일상을 파고드는 시대에 가치 있는 ‘만들기’의 정수를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공예의 소박하고 낭만적인 미덕을 기리는가 하면, “그런데 이게 공예야, 현대미술이야, 아니면 디자인이야?”라는 질문을 내뱉으며 아리송하지만 감탄 어린 눈빛을 보이기도 한다. 후자의 반응을 논하자면, 소위 ‘현대 공예’라 불리는 다양한 작품의 모양새, 규모, 전시 방식 등을 놓고 볼 때 누구는 ‘현대미술가’이고 누구는 ‘현대 공예가’라고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닮은꼴이 많은 게 사실이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사회적 가치를 지녀왔음에도 공예는 이론적 체계와 담론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순수미술과 디자인 사이에 끼어 있는 미아처럼, 혹은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자리를 옮겨가며 분류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이 분야의 걸출한 이론가 하워드 리사티 교수는 공예와 미술은 둘 다 손을 쓰는 ‘호모 파베르’가 의식적으로 창출한 사물이지만,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태생부터 자연에 종속되고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공예가 인류적 보편성을 지닌 데 반해, “순수미술품은 사회적 맥락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술품의 기호 체계를 읽어내지 못하게 되면 원래 지니고 있던 의사소통의 의미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공예는 인식이나 언어를 떠나 손에 잡히는 ‘진정한 사물(real object)’로서 독립성과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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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스쳐간 공예가들과 ‘아트 주간’에 만난 이들을 보면서 느낀, 가장 와닿는 차이점은 사물과 재료, 장인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일례로, 올해 예올×샤넬 전시에서 만난 이윤정 작가는 대개 주변부의 부속품으로 치부되는 못을 마치 액자 속 ‘주인공’처럼 내세운 작품을 선보였는데, ‘평등한 사물끼리의 평등한 상태’에 대한 소신과 사물에 대한 애정은 제인 베넷 같은 학자의 생기적 유물론을 떠올리게도 했다. “못과 액자 사이에서 뭐가 더 메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저 스스로 질문해봤을 때는 그냥 똑같았거든요.” 공예가들은 제작을 맡은 기술자와 장인들의 ‘손’과 ‘시간’에 대해서도 커다란 존경심을 내비친다. 청주공예비엔날레의 <현대 트랜스로컬 시리즈>에 참여한 고소미 작가는 “장인이야말로 진짜 공예가”라면서 자신은 그저 현대 공예 작가로서 전통 기법을 이용해 현대화해가는 과정에 쓰임이 된다면 정말로 감사한 일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물질 세계의 제약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지만, 그럼에도 장인의 정신과 기술을 이어가며 열정 어린 손길로 부단히 뭔가를 빚어내고자 하는 공예가의 태도. 이는 마하트마 간디의 자립과 저항 정신이 담긴 ‘카디 면’으로 인디고 회화 작업을 한 카이무라이, 유목 문화를 반영한 펠트의 미학을 보여준 키르기즈공화국 작가들, 명상적이고 수행적인 설치 작업을 보여준 태국 공예가들에게서 섬세하고 명징하게 드러난다(청주공예비엔날레를 추천하는 이유다). 이렇듯 시공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예의 가치를 목도할 수 있는 현장을 대하니 “공예품을 만드는 일은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인류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리사티 교수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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