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지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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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01, 2023

글 고성연

현대미술이 고맙게도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줄 때가 있다.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감성과 사고, 그리고 그것들을 은유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조금 더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덕분인지, 단지 지식과 안목에 보탬이 되는 수준을 넘어 편견과 편향을 덜어내고 보다 많은 진실을 마주하게 해준다. 그것이 매번 번득이는 ‘각성’과 담대한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않을지라도, 순수하게 책 한 권에 집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정신없는 일상 아닌가. 지난해 말 주로 현대미술을 벗 삼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여정은 ‘대지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된 계기가 됐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동명의 책에서 ‘꿈의 시대에서 온 사람들’이라 불린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토착민들. 축복 같은 대자연 속에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견뎌내온 이 ‘대지의 수호자’들은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류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수년 전 글로벌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 홍콩을 찾았을 때 이런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현장을 잠시 접한 적이 있다. 사실 희소성 있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있다 vs 없다’의 두 갈래로 팽팽히 나뉜 열띤 토론에서 정작 재미난 점은, 예술이 결코 정치처럼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해결책이나 압도적인 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냉철한(?) 입장을 견지한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엄연히 현대미술 생태계에서 밥 먹고 사는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였는데 말이다. 개인적으로 예술이 사적 차원을 넘어 공적 영역에서도 긍정적 변화의 ‘주된’ 원동력이 된다거나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라는 쪽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지만, 한 가지 믿음은 있다.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는 현실의 민낯을 창조적이고 정제된 방식으로 ‘드러내’ 단순한 지식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고 깨달음을 선사하는 예술의 순기능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세상에 널려 있어도 무지와 무관심, 편견 등으로 말미암아 잘 보지 못하는 진실을, 때때로 예술은 날벼락처럼, 혹은 잔잔한 물결처럼 일깨운다. 자본주의의 꽃으로 상품화된 현대미술의 면모에 간혹 염증을 느끼다가도 이국의 도시를 여행할 때 여전히 미술관에 무심코 들르게 되는 건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믿음이 수면 아래 은근히 작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10여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갔을 때도 미술관을 향한 우연한 발걸음이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게 만든 계기가 된 적이 있다. 솔직히 오스트레일리아에 관한 다면적 지식이라든가 여행지 정보를 충분히 채우고 떠난 여행길이 아니었다. 현대미술이나 문화 예술 분야와는 관련 없는, 갑작스레 잡힌 출장이었다. 게다가 여행 작가 빌 브라이슨이 자신의 책에서 털어놓았듯 우리는 이 남반구에 커다란 땅덩이를 지닌 ‘자원 대국’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나라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여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그는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방식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낮은 관심도’를 기사 검색 같은 통계를 빌려 구구절절 설명했다). 물론 오스트레일리아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캥거루, 코알라 같은 키워드를 떠올리게 되는, 관광지로는 인기 있는 나라지만 ‘화제성’을 따지자면 일리 있는 주장인 듯싶다. 하지만 언뜻 무척 평화롭게만 보여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광대한 나라는, 사실 꽤 흥미롭다는 빌 브라이슨의 말에 동의한다(여러 의미에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나라이자 가장 큰 섬나라이며, 한 국가를 이루는 유일한 대륙, 한 대륙을 이루는 단 하나의 섬, 지구상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온갖 희귀 생물의 서식지 같은 상식 말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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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앞서 ‘사과문’부터 내건 오스트레일리아의 미술관들
필자에게는 마침 격년에 한 번 치러지는 현대미술 비엔날레가 진행되고 있던 시드니의 주립 미술관이 그 흥미의 단초를 제공한 공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풍경이지만, 미술 세계에서 동시대의 첨예한 이슈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엔날레의 성격상 ‘원주민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현장이었는데, 전반적으로 머리 숙여 ‘사죄’하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알다시피 오스트레일리아는 18세기 말 영국이 자국의 죄수들을 이주시킨 유형(流刑) 식민지로 태동한 나라다. 1788년 1월 26일 영국 해군 아서 필립(훗날 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 총독)이 죄수와 군인 등 1천 4백 명 가량의 이주민과 가축 등을 실은 선단을 이끌고 도착한 곳이 바로 시드니항이다. 최소 75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원주민이 살고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그들은 거침없이 차지했고, 양측의 관계는 아주 초기에만 우호적이었을 뿐 곧 쓰라린 근현대사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무자비한 학살과 결핵, 천연두 같은 전염병과 성병 등 이주자들이 들여온 질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10여 년에 걸쳐 90%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현재 원주민 인구는 전체의 3%대 수준). 그 뒤로도 유린은 지속됐다. 20세기 초에는 원주민 보호를 명목으로 강제 이주를 밀어붙였고 기본 인권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원주민-백인의 혼인으로 혼혈 인구가 급증하자 ‘동화 정책’을 펼쳤다. 그렇지만 말로만 ‘동화’, ‘문명화’를 내세웠을 뿐 ‘순혈’ 원주민은 사라지도록 방치하고 혼혈은 백인 사회로 흡수시키는 차별을 휘둘렀다. 심지어 원주민의 혼혈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해 백인 가정에 입양시켜 ‘생이별’을 겪게 하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했는데, 이 아이들을 가리켜 ‘빼앗긴 세대(The Stolen Generation)’라 부른다.
늦게서야 각성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995년 강제 분리의 희생양이 된 아동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는데, 여기서 나온 보고서명이 ‘Bringing Them Home’(1997)이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를 발표한 건 2008년이나 되어서다. 당시 케빈 러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의회에서 사과의 뜻을 담은 말을 거듭하면서 용서를 구했고 “오늘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했다. 이미 동시대 예술가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원주민 찬탈과 탄압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지만 미술계의 분위기도 더 ‘공식적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원래 주인들, 영국 식민 통치에서 살아남지 못한 ‘무위니나(Muwinina)’ 사람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Tasmanian Aboriginal) 커뮤니티가 루트루위타(지역 원주민어로 ‘태즈메이니아’라는 뜻)의 지속적인 관리인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최남단의 섬인 태즈메이니아주의 주도 호바트(Hobart)의 주립 미술관에 가면 실제로 이렇게 적힌 문장을 전시장 입구에서 볼 수 있다. ‘Apology to Tasmanian Aboriginal People’이라는 제목의 사과문도 함께. 천혜의 자연을 품은, 면적이 제주도의 34배(62,409km²)나 되는 큰 섬 태즈메이니아는 오스트레일리아 본섬과 떨어져 있지만 역시 유형 식민지로 처절하게 약탈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호바트에 있는 주립 미술관(The Tasmanian Museum and Art Gallery)에서는 현재 < taypani milaythina-tu: Return to Country >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데,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의 가슴 아픈 역사와 그 속에서 꽃핀 문화 예술의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한 혼혈 작가가 흰 편인 자신의 피부색을 보고는 “얼마나 원주민 피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난 32.65% 원주민(aboriginal)이야”라고 답하곤 한다는 냉소적인 문구를 보면, 엄연히 역사가 낳았지만 우리 사회가 더 멍들게 하는 가슴 아픈 상처의 편린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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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을 표방한 ‘시드니 모던’ 프로젝트와 원주민 작가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탄생한 이래 ‘역대급’ 문화 예술 프로젝트로 얼마 전 공개한 뉴사우스웨일스(NSW) 주립 미술관 신관에서는 ‘통합’과 ‘화해’에 대한 의지가 더 여실히 드러났다. 8년여에 걸친 기간과 한화 수천억원에 이르는 예산이 투입된 ‘시드니 모던(Sydney Modern)’ 프로젝트의 결실로 19세기 후반에 세운 고색창연한 미술관 본관 옆에 일본 건축 스튜디오 SANAA가 그야말로 ‘모던하게’ 설계한 지상 1층, 지하 4층짜리 대형 미술관이 들어섰는데, 화합과 소통의 손길을 내밀거나 서로 손을 마주 잡은 인간 형상을 한 커다란 조각들이 놓인 앞마당을 지나 1층에서 입구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바로 보이는 큰 전시장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작가들의 작품(미술관 소장품)을 위한 공간이다(이미 본관 건물에서 1994년 전용 공간이 꾸려져왔다고 한다). 이름하여 ‘이리바나(Yiribana Gallery)’. 시드니 지역 원주민의 원어로 ‘여기로, 이쪽으로(this way)’라는 뜻이다. 정확히는 애버리진(aboriginal)과 토레스해협제도 원주민(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크게 본섬과 태즈메이니아, 그리고 토레스해협 원주민을 포함한다) 작가들의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군데군데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풍경이나 미술관 바깥 풍경이 보이는 유리창을 낀 밝고 편안한 분위기가 ‘관람’의 플러스 요인이다. 신관을 지으면서 NSW 주립 미술관은 동시대의 주요 현안을 포용적으로 다루겠다는 ‘변혁’을 선포했는데, 이 가운데 당연히 원주민 이슈도 포함되어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원주민으로 꼽히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원주민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땅을 침략한 데 대한 사과의 의미를 담았다고 여겨진다. 학자들은 원주민들이 이 대륙에 온 시기를 4만여 년, 길게는 6만 년 전쯤으로 추정하는데, 18세기 말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은 ‘주인 없는 땅(테라 눌리우스)’이라 명시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리바나 갤러리와 더불어 미술관 곳곳에 자리한 원주민 출신 작가들의 예술을 찬찬히 보면 느껴지듯 이들은 시간이 시작됐을 때부터 이 대지에 속해 있었다는 ‘꿈의 시대(dream time)’라는 고유의 세계관을 지닌 채 독자적인 전통과 문화를 평화롭게 일궈내왔다(원래는 5백 개 부족 주민이 약 2백50개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많이 말살됐다). 자신들이 신성한 대지의 일부라고 여기고 수호자임을 자처한 이들은 몸에 그리는 문양도 개인과 부족마다 달랐을 만큼 창조성을 중시했다고 한다. 그토록 다채로운 예술가들의 작업 세계를 굳이 한데 묶어놓는 식의 공간이 별도로 필요할까, ‘애버리진 예술’이라는 용어 자체가 본질을 희석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NSW 미술관 본관에서는 애버리진 출신으로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작가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기도 했기에(우리나라도 국제갤러리 전시를 통해 밀도 높은 호응을 받아온 작가다) 적어도 ‘균형’에 대한 노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들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창조성에 대해 모르는 수많은 지구인에게 인식의 물꼬를 터줄 수 있는 안내판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스쳤다. 개개인의 영혼에 일으킨 인식과 감동의 파문(波紋)이 하나둘씩 모이면 늘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프랑스 예술가 JR이 말했듯 결국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방식’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커리어 사상 최대 규모의 전시”라며 작가 스스로 설명하며 미소 지었던 다니엘 보이드의 전시를 시드니를 떠나기 전 한 번 더 보러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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