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도 비범한, 일상적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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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5, 2023

글 김민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일반적이지 않은 구도와 명암, 표정 없는 인물들에서 느껴지는 이 고요하고도 쓸쓸한 감정은 무엇일까. 그림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시선을 뗄 수 없다. 그림 속 인물들이 팬데믹 시대를 거쳐온 지금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 더욱 마음을 이끈다. 전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Edward Hopper: From City to Coast)>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고 있다(8월 20일까지). ‘에드워드 호퍼’라 하면 으레 떠올리는 대표작이 없어 실망스럽다는 평이 많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풍경화나 생계를 위해 그린 일러스트 작품, 그리고 수많은 예술가 부부가 그렇듯 애증의 관계였지만 호퍼가 빛을 볼 수 있게 조력한 아내 조세핀 호퍼의 기록 등 호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다. 오직 자신이 추구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생을 살아온 에드워드 호퍼.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이 이토록 고독해 보이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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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패터슨이라는 도시에 사는 시인이자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단조로운 일상을 그린다. 주인공은 아침 6시 10분께 눈을 떠 출근해 23번 버스를 운전하고, 점심에는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쓰고, 퇴근 후에는 반려견과 산책하다가 동네 단골 바에서 맥주를 한잔 마신다. 월요일에서 시작해 일요일, 그리고 다시 월요일 아침에서 끝나는 영화는 마치 평범한 현대인의 일상 중 일주일을 무작위로 골라 보여준 것처럼 특별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잠깐 눈을 돌리면 규칙적이고 무료해 보이는 그의 일상도 소소한 사건들로 변주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일상의 틈에서 영감을 발견해 시를 쓴다. 출근 전 시리얼을 먹으며 식탁에 놓여 있는 성냥갑에서 불현듯 영감을 얻고 성냥갑은 은유가 되어 사랑의 시로 마침표를 찍는다. 영화는 말한다. 시는 이렇게 평범한 일상에 존재한다고.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는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처음 본 호퍼의 작품은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이다. 현재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전시장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은 어두운 밤, 불을 밝힌 바에서 한 남자와 남녀 커플, 그리고 일하고 있는 바텐더를 그린 그림이다. 지금도 밤늦게 뉴욕 거리를 배회하다가 어렵지 않게 마주칠 것 같은 풍경이다. 고달픈 하루를 달래는 것인지, 다가올 내일을 걱정하는 것인지, 그들의 속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마치 영화 <패터슨> 속 패터슨의 하루처럼 무료하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네 사람의 일상이 그저 같은 화면에 포착된 것 같다. 호퍼의 작품이 어쩐지 친근한 이유는 그가 택한 소재가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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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기에 더 특별한 일상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난 호퍼는 일생의 대부분을 뉴욕에서 살았다. 유럽 도시와 멕시코를 여행하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기도 했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도시는 뉴욕이었다. 그래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고,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 중 대부분도 뉴욕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다. 20세기 초 대도시에 있는 19세기 흔적이 남은 건물, 빽빽한 마천루 사이 여유로운 공원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이 그림의 주 소재였다. 기념비적 사건, 전설이나 신화 속 인물이 아닌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도시의 모습. 사실적인 묘사지만 결코 설명적이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밤의 창문’(1928)에서 창문 너머 어렴풋이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처럼, ‘통로의 두 사람’(1927)에서 대극장에 있는 세 인물처럼, 각자 사연을 품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호퍼의 그림 앞에선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공백의 서사를 상상으로 채워가게 된다.
호퍼가 활동하던 20세기 초·중반은 산업화와 도시의 번영,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 등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은 시기였다. 격동의 시기를 관통하던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덤덤하게 그림에 담았다. 오늘날까지도 호퍼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평가와 감상처럼 그가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 소외감을 의식해서 표현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 내면의 삶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듯, 단지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그는 늘 주변 가까이에서 소재를 찾았으며,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림을 중단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여행을 하며 영감을 찾아다녔고, 그래서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 등 미국 동부 지역을 머물던 시기에는 자연스레 해안가를 그린 풍경화를 많이 남겼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보적 화풍

1910년 전후 초창기 작품은 빛의 표현법과 구도 등에서 유럽의 인상주의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호퍼는 이를 본인만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만들어갔다. 1920~1930년대 유럽에서 르네 마그리트와 파블로 피카소, 미국에서 잭슨 폴록이 큰 주목을 받으며 추상주의가 대세를 이룰 때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특정 종파나 사조로 분류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언제나 자연에서 받은 가장 내밀한 인상을 최대한 정확히 옮겨 기록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호퍼는 회화의 장식적 개념을 강조하던 동시대 예술과도 거리를 두고, 어떤 사조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런 고집 때문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진로를 정해 화가의 길을 걸었지만 호퍼는 40대가 되어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내면의 삶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위대한 예술이라 주장했듯 본인의 철학을 고집스럽게 지켜오며 쌓인 내면의 고독이 자연스레 작품에 표현된 게 아닐까.
호퍼의 그림은 영화 <패터슨> 감독 짐 자무시를 비롯해 앨프리드 히치콕, 빔 벤더스 등 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어둠에 가려져 웃는지 우는지 드러나지 않는 인물들의 표정, 캔버스 안으로 드리운 밝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공기처럼 남겨놓은 여백의 공간. 호퍼의 그림은 일상적이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채워져 있지 않기에 많은 상상력을 요구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호퍼의 그림들을 보며 영화 <패터슨>의 대사를 떠올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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