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를 넘어선 문화도시의 ‘작은 판’으로서의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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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03, 2025

글 고성연

지구에 길고도 짙은 그늘을 드리웠던 팬데믹이 마침내 수그러들면서 엔데믹으로의 전환이 이뤄진 2022년, 세계적인 아트 페어 브랜드 프리즈(Frieze)의 아시아 시장 진출은 단연 글로벌 미술계를 들썩이게 한 행보였다. 지금과 달리 전반적으로 미술 시장이 뜨겁게 타올랐고, 이미 팬데믹 전부터 아시아 시장의 ‘문화 예술 허브’라는 타이틀을 둘러싸고 여러 도시가 상당히 공을 들여왔기에 프리즈의 아시아 허브가 된 서울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프리즈 효과’를 향한 기대감도 부풀었지만, 진출 방식이 한국 미술 시장을 대표하는 아트 페어인 키아프(Kiaf Seoul)와의 공동 개최였기에 볼멘소리도 불거졌다. 사실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2003년) 프리즈보다 오래된 업력을 지닌 키아프(2001년)지만 ‘브랜드 파워’에서 밀릴 게 뻔한데, 어째서 안방을 순순히 내주느냐는 것이었다. 이제 4년 차를 맞이해 내년이면 5년의 동행이 일단락되는 ‘키아프리즈’가 아직 파트너십의 2라운드를 확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간 ‘따로 또 같이’ 방식의 아트 페어 동맹이 불러온 의미 있는 변화와 플랫폼으로서의 지속성 있는 경쟁 우위를 곱씹어본다.



플랫폼에 참가하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_<플랫폼 전략>(히라노 아쓰시 칼, 안드레이 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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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홍콩에서 열린 아트 바젤(Art Basel Hong Kong)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목적지 근처에서 교통 체증이 유난히 심해지자 택시 기사가 내뱉은 푸념을 접한 기억이 있다. “대체 이 글로벌 아트 페어라는 건 누가 그렇게 관심을 갖길래, 대단한 파티나 콘서트처럼 난리법석을 떠는 거냐”던 그는 소시민들이 꾸려가는 평범한 일상과의 간극을 꼬집었다. 당연히 아트 페어는 파티도, 영화제도, 콘서트도 아닌, 현대미술을 주 상품으로 내놓는 장터(marketplace)다. 어찌 보면 그림 한 점, 조각 한 점 사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온갖 미디어에서 떠들어대고, 하늘길을 건너 찾아오는 다국적 손님(컬렉터)들을 유혹하고,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등장한 듯 비단 소비자가 아니더라도 구경꾼으로서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걸까. 일찍이 발터 베냐민 같은 명민한 학자가 지적했듯 이 같은 풍경은 소비문화에 휩쓸린 도시가 빚어내는 씁쓸한 신화의 단면일 수도, ‘그들만의 리그’일 수도 있지만, 그저 경제적인 득실만 따지면 그뿐인 단순한 비즈니스의 장(場)은 아니다. 문화 예술 생태계만 놓고 보면 다분히 건조하게 비쳐졌던 홍콩의 소프트 파워와 이미지를 확연히 바꿔놓은 핵심적 동력, 그리고 필자에게도 동양과 서양, 그리고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결합으로 특수한 정체성을 띤 이 도시의 묘한 매력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 계기 역시 바로 글로벌 아트 페어였다. 문화도시로서의 짜임새와 에너지를 끌어올려 다른 차원의 ‘판’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되는 플랫폼 비즈니스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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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시대의 무한 경쟁과 문화도시에의 선망
그 전환의 파도가 팬데믹의 스러짐과 발맞춰 우리네 수도 서울에도 찾아왔다. 2013년 스위스 MCH 그룹이 홍콩 아트 페어를 인수해 아트 바젤 홍콩으로 거듭나게 했던 데 반해, 키아프(Kiaf)와 프리즈(Frieze)는 ‘동맹’을 택했다. 각자의 플랫폼을 유지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지만 개최 시기(9월 초)와 무대(코엑스)를 함께하고 공동 티케팅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따로 또 같이’ 노선을 꾸리는 방식이었다. 사실 프리즈로서는 ‘무혈 입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엄연히 로컬이 아니라 국제적 페어를 지향하는 터줏대감(키아프)에 직격탄을 날린다는 이미지의 손상 없이 친화적인 공동 마케팅을 전개함으로써 여러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디자인과 예술 산업을 아우르는 생태계에서도 멀티 마켓플레이스 전략은 기업의 팽창과 생존을 위한 필수 행보가 된 지 오래다. 예컨대 스위스 바젤을 모태로 한 아트 바젤이 홍콩, 마이애미(미국), 파리(프랑스)로, 프리즈는 최대 시장인 미국의 동·서부(뉴욕, 로스앤젤레스), 서울로 각각 플랫폼의 다각화를 이뤄냈고, 디자인계 최대 행사인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Salone del Mobile Milano)도 모스크바, 상하이에 플랫폼을 확장시킨 데 이어 내년에 중동(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할 예정이다.
소비자(컬렉터)와 화랑을 연결하는 아트·디자인 페어는 엄연한 플랫폼 비즈니스지만 우리가 흔히 일컫는 플랫폼 생태계의 공룡인 이른바 MANGO(Microsoft, Amazon, Netflix, Google, OpenAI)가 누리듯 다수의 클릭과 구독에 힘입은 엄청난 네트워크 효과’를 기대할 만한 비즈니스 영역은 아니다. 온라인 거래 규모가 계속 커지고는 있지만 물리적 공간과 제품이 필수이며, 워낙 관계성이 중시되며 ‘미술 권력’이라 할 정도로 큰손의 비중이 큰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시의 세기’에서 선망되는 문화도시라는 위상과 긴밀히 연결되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브랜드 파워를 지닌 글로벌 플랫폼, 그리고 컬렉터 숫자가 아니라 문화도시로서의 포용력이라는 맥락에서 이미 잠재 수요가 꿈틀거리고 있던 도시가 만났을 때 어떤 파급효과를 거두는지 우리는 ‘키아프리즈’ 첫해부터 목격했다. 내로라하는 럭셔리 브랜드를 위시해 패션, 자동차, 그 밖에 라이프스타일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브랜드의 후원 프로그램도 그렇지만, 키아프리즈 주간을 전후로 동네별로 펼쳐지는 수백여 개의 다채로운 행사는 문화도시의 요건인 자발적 예술의 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올해도 열리는 한남 나이트(9. 2), 청담 나이트(9. 3), 삼청 나이트(9. 4) 같은 유기적 행사는 그 역동성에 놀라는 해외 관람객들만이 아니라 분명 우리에게도 ‘즐거운 발견’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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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째서 ‘키아프리즈’ 라 부르지 않을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기 있는 서울의 문화 신(scene) 자체가 배경이 되고 있는 지금, 프리즈 서울이 그 일부가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프리즈 서울의 디렉터 패트릭 리는 지난달 말 열린 ‘키아프 × 프리즈 서울(Kiaf SEOUL × Frieze Seoul) 2025’ 공동 기자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현재의 ‘공생적인’ 파트너십이 이어져 앞으로 아시아 미술 생태계의 깊이와 다양성을 반영하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더 성장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글로벌 ‘아트 피플’의 방한이 잦아지는 가운데 해외의 다양한 갤러리들이 아예 지점을 꾸리든 팝업으로든 입성하고, 여러 브랜드들이 창조적 후원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많은 한국 작가들의 재발견과 더불어 세계 무대 진출도 활발해졌다. 안 그래도 서울의 인지도는 물론 도시 자체에 대한 관심도와 호감도가 갈수록 높아가는 요즈음, 이렇듯 문화 예술계에서 전개되는 대형 이벤트의 미학은 긍정적인 기운을 더해준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중장기적으로 균형 있는 진화가 가능한 상생의 플랫폼일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의 해법을 모색해야 할지, 보다 치열하게 고민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과연 ‘프리즈’라는 레이블을 떼어냈을 때도 초라하지 않을 만한 독자적인 브랜드 경쟁력을 그동안 키워냈을까? 9월의 아트 주간을 겨냥해 이를 연결 짓는 축제명이 나오고 있고, 일각에서는 ‘키아프리즈’라는 별칭도 쓰지만 생태계 바깥에 걸친 대다수 사람들은 물론 미술계 인사들도 ‘프리즈 위크’라고 부르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아트 페어도 수명을 장담할 수 없기에, 키아프리즈 같은 표현은 프리즈의 엑시트 혹은 각자도생의 길을 갈 때 바로 없어질 수식어지만, 적어도 지금은 창조적 시너지를 낼 공동 브랜딩을 유기적으로 펼치고 자체 콘텐츠를 풍부하고 견고하게 다져나갈 전략적 고민과 과감한 실행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까운 이웃 도시의 예를 보자면 일본에는 대중적인 슈퍼 팬덤과 브랜드 파워를 지닌 거장이 꽤 있지만, 현대미술 시장은 외려 외면당해왔다고 할 정도로 존재감이 부족했는데, 팬데믹 시기에 ‘아트 위크 도쿄’라는 플랫폼이 등장했고, 아트 페어계의 최강 브랜드 아트 바젤의 지원을 받으면서 점차 글로벌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물론 아트 바젤이 들어가기에는 ‘시장’이 보이지 않은 탓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일본의 동시대 미술 위주로 짜임새 있는 마케팅이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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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성이 흐르는 ‘글로컬’한 놀이터를 향해
물론 키아프의 외연과 내연도 성장세를 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단 규모를 보자면 미술 시장 호황기였던 2021년 단독 개최했을 당시 참여 갤러리가 1백64개 수준이었는데, 작년에 2백6개까지 늘어났다. 올해는 양적 성장이 아닌 내실을 기하겠다는 방향성 아래 20여개 국 1백75개 갤러리가 참여한다(프리즈 서울은 작년과 비슷한 1백20여 개 수준을 유지한다). 둘을 합치면 세계 최강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의 원조인 바젤 페어(ABB)와 맞먹는 규모다(위성 페어를 제외한 기준으로). ‘글로컬’의 속성을 점차 띠어가고 있기도 하다. 키아프 참여 갤러리들 중 3분의 1 가까이(올해 기준 27~28%)가 해외 갤러리이고, 프리즈의 경우에는 국내 갤러리이거나 국내에서 운영 중인 글로벌 갤러리의 비중이 35%다. 키아프에서 인정했듯 (24년이라는) “역사성이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고, 초창기부터 함께해온 일부 회원 갤러리들은 새로운 심사 기준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점차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제적 시선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를 소개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한국화랑협회 김정숙 홍보이사)”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 키아프는 ‘공진(resonace)’이라는 주제를 내걸고(공식 테마를 발표한 건 처음) 프리즈와의 시너지를 모색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사실 플랫폼의 장외 풍경을 보면 이미 학습 효과가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 대안 공간부터 비영리 기관, 갤러리, 미술관을 아우르는 미술 생태계에서는 갤러리-브랜드, 갤러리-갤러리, 갤러리-기관, 브랜드-기관 등 저마다의 수요에 맞춘 다양한 방식의 합종 연횡을 모색하며 느슨한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올가을에는 예년에 비해 여러 결의 한국 작가들을 알리는 기획이 눈에 많이 띈다.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매개의 판은 플랫폼이지만, 그 안에서 무수한 연결 고리를 꿰는 역할의 지휘봉은 결국 ‘사람’이 쥐고 있다. 경계심을 늦추다가는 순식간에 플랫폼의 지배에 놓이고, 고객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올가미에 얽매일 수 있지만, 플랫폼 자체도 얼마든지 망가지거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결국 연결의 리더가 되도록 전략을 짜되, 플랫폼 생태계에 속한 이해관계자들의 ‘본원적 욕구’라는 원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그건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콘텐츠가 아닐까.





Kiaf SEOUL×Frieze Seou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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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Kiaf SEOUL×Frieze Seoul 2025_ 응시로 시작하는 여성의 연대, 콤플렉스에서 프라이드로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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