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체험의 장이 되어가는 호텔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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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 2026

글 고성연

‘머무름의 이유’를 만들어내는 ‘스테이’

여행의 의미가 ‘어디로 떠나는가’에서 ‘유의미한 경험을 위한 머무르기’로 옮겨 가고 있다. 오늘날의 스테이는 잠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그 지역의 시간과 공간, 사람과 문화를 압축한 경험의 장이 된다. 특히 밀레니얼·Z 세대와 프리미엄 여행객 사이에서는 단순한 숙박보다 스토리, 문화, 로컬 체험에 관심을 쏟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인스타그램 친화적 경험, 체험의 공유, 삶의 지평 확장하기 등의 가치에 비중을 높게 두고 숙소가 위치한 지역과 상호작용하고자 적극 나선다. ‘호텔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는 표현까지 나오는 이유다. 얼마 전 글로벌 숙박 플랫폼 기업 에어비앤비가 제주에서 진행한 미디어 행사는 지역 상생을 꾀하는 문화적 체험에 골몰하는 이 생태계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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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지평’을 넓혀주는 연결 고리로서의 숙박
‘여행이 분산될수록 지역사회는 경제적 혜택을 입는다.’ 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명의 호스트가 사업을 시작한 이래 20년 만에 연간 17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플랫폼 기업이 된 에어비앤비에서 빈번히 강조하는 메시지다. 분산된 여행은 가성비를 보다 높여주고, 지역 경제와 일자리를 북돋우며, 여행자들이 지역사회에 녹아든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데, 이처럼 상생적 관광의 혜택을 새롭게 떠오르는 여행지에 나눠주는 ‘탈집중형 여행’을 에어비앤비가 돕고 있다는 맥락이다. 그런데 한국 여행객의 경험은 여전히 획일화되어 있고, 많은 이가 콘텐츠에 목말라 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에어비앤비는 지난 3월 초 제주 서귀포에서 ‘대한민국 방방곡곡: 지역에 머물게 하는 공간·콘텐츠·사람’을 주제로 내세운 비전포럼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여행 트렌드의 변화와 지향점을 짚어보는 세션을 진행했다. 지난 1년간 국내 여행 경험자 1천 명(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방문지는 강원, 제주, 부산 등 특정 지역에 집중되고, 여행 목적 역시 미식(64.4%)에, 숙박 형태는 호텔·리조트(70%)에 편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42.4%가 ‘지역별 특색 있는 콘텐츠·경험 개발’의 필요성을 인정했는데, 20대의 상대적으로 인상적인 대전 방문 비중(7.3%, 4위)은 ‘빵지순례’로 불리는 대전의 빵집 성심당 같은 로컬 콘텐츠가 여행 결정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을 보여준다(Airbnb, 엠브레인 조사, 2025). 호텔이든 리조트든 에어비앤비든 요즘 숙박을 둘러싼 생태계가 특정 지역을 찾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경험, ‘앵커 콘텐츠’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숙소 자체가 지역을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 체험의 장이 되도록 ‘공간’ 만들기에 애쓰고, 크리에이터, 아티스트, 장인과 협업하거나 지역(마을, 자연, 문화)과 연계한 맞춤형 체험 프로그램을 꾸리는 전략적 행보는 날이 갈수록 스펙트럼과 깊이를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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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밀도가 높은 체험 콘텐츠의 선두 주자들
사실 호텔 생태계에서 ‘체험 경제’에 초점을 둔 남다른 콘텐츠는 꽤 오래전부터 존재감을 발휘해왔다. 다만, 소수의 럭셔리 호텔과 리조트가 내세워온 차별화 전략이자 정체성이었다. 아만(Aman), 포시즌스, 벨몬드, 호시노야, 식스센스, 그리고 최근에 떠오르고 있는 카펠라(Capella) 같은 브랜드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문화적 경험을 엮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행객을 더 의미 있게 머무르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머무름 속에서 지역을 느끼게 한다.


‘문화적 럭셔리’의 선두 주자는 아무래도 아만이다. 수십 년 전부터 천혜의 자연을 품은 외딴곳을 무대로 힐링과 지역 문화를 누리는 콘셉트를 내놓은 리조트 브랜드 아닌가.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은 ‘원조’ 아만의 장점은 리조트 내에서 거의 모든 체험이 이뤄지는 전천후 플랫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발리 동쪽에 자리한 언덕 위 리조트인 아만킬라(Amankila)에는 힌두 문화권의 일상이자 의례인 ‘성수 정화(water blessing)’ 의식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알록달록한 전통 의상을 입고 인근 언덕을 오르면 깊고 푸르른 바다를 배경으로 힌두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지역 문화의 정수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체험도 가능하다. 외부 영향이 거의 없는 고대 발리 문화의 본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텡가난(Tenganan) 마을 투어도 그중 하나. 발리 아가 공동체의 일상과 전통으로 여행객을 데려가는 이 당일 체험에서는 아름다운 ‘게링싱(Geringsing)’ 직물의 복잡한 염색과 무늬 제작 기술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또 자연의 선물인 현지산 꿀 시식도 묘미다. 이 마을 주변 숲에 서식하는 침 없는 작은 벌에서 채집하는 검은색의 켈루룻(Kelulut) 꿀은 달콤하면서도 신맛 나는 희귀한 양욕 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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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화 큐레이션’으로 주목받고 있는 카펠라는 ‘도시로 나가는 관문’으로서의 머무름을 설계하는 느낌을 주는 브랜드다. ‘컬처리스트(culturist)’라 불리는 호텔 스태프의 친절한 안내로 고객을 위한 전천후 라운지인 ‘리빙 룸’에서 로컬 문화에 대한 간단하지만 나름 실속 있는 세션을 진행하고, 원하면 낮에는 도시 탐험을 권유한다. 그래서인지 호텔의 입지 자체에 굉장히 공을 들인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포브스 5성’ 목록에 오른 카펠라 상하이는 옛 프랑스 조계지의 중심 주거 지역인 쉬후이구의 전통 스쿠먼 건축을 보존·복원한 도심형 럭셔리 리조트다. 1930년대에 지은 스쿠먼 골목과 돌문이 연속된 골목길이 호텔 부지를 감싸며, 55채의 스쿠먼 빌라와 40개의 서비스 레지던스로 구성된다. 빌라를 벗어나는 순간 바로 주변 도시 탐험이 시작된다. 골목길을 따라 진행되는 사진 투어는 방문객을 쉬후이의 문화적 풍경으로 초대한 뒤, 프렌치 스타일 공원, 현지 시장, 오래된 주택가 등을 함께 걸으며 상하이의 ‘now & then’을 포착하게 한다. 호텔 인근에 자리한 저명 작가 샤옌(Xia Yan)의 옛 주택을 방문하며 중국 근현대사의 흔적을 체감하는 코스도 있다.


일본 호시노 그룹의 럭셔리 브랜드 호시노야는 좋은 사례다. 호시노야 가루이자와는 호시노 집안의 료칸 전통을 잇되 현대적 럭셔리를 결합한 공간이다. 나가노현 산속 계곡에 자리한 이 리조트는 자연과 인간, 문화가 유기적으로 얽힌 체험을 제공한다. 리조트를 포함한 인근 커뮤니티를 ‘호시노 에어리어(Hoshino Area)’ 라고 부르는데, 문화적 명소와 레스토랑과 상점, 카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원천수로 채운 ‘톤보노유’ 온천은 누구에게나 개방하며, 고객 전용 명상탕은 극명한 어둠과 빛을 오가며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마도 가장 독특한 인기 만점 프로그램은 ‘피키오 야간 투어’일 것이다. 날다람쥐의 야간 비행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으로, 자연 속 생명체의 리듬을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이다. 그들의 일상 패턴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자연적 리듬에 따른 움직임을 숨죽여 지켜보는 생생한 묘미가 남다르다. 조금만 더 지역을 탐방한다면 이 마을의 명소인 돌 예배당과 자연보호 운동가이자 시인인 나카니시 고도 시비(poetic monument)와 흉상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숙소 자체가 지역적 서사와 결합되어,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방문객은 내면적 여정을 머금은 ‘몰입형 스테이’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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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을 모색하는 플랫폼, 에어비앤비의 시도
에어비앤비는 플랫폼 기업이라는 조직 특성상 호텔처럼 고정된 공간을 보유하진 않지만, 로컬 숙소와 체험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머물 이유’를 제공한다. 제주에서는 ‘할망숙소’ 프로젝트가 눈에 띈다. 올레길을 찾는 여행자를 대상으로 시니어 여성 호스트들이 운영하는 숙소로, 해녀들의 삶과 지역 문화를 직접 배우는 기회를 제공해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노후된 시설도 많아지고, 할망들도 건강이 안 좋아져서 새롭게 정비한 뒤 시즌 2를 펼칠 예정이다. 서울에서 반세기를 살다가 제주의 자연에서 안식을 찾은 해녀 최순덕 씨, 그리고 30년 넘게 수학을 가르치다 제주에 와서 해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김순희 씨는 에어비앤비의 제주 비전포럼에서 향후 ‘할망숙소’ 호스트로서의 설렘 깃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해녀의 조업 방식, 바다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제주 문화 속 생존의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을 통해 여행객은 숙소를 디딤판 삼아 지역인의 일상, 음식, 마을 이야기를 접하고 ‘왜 여기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감각적으로 체득하게 된다. 제주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머물 이유’를 알려주는 경험 콘텐츠가 창의적이지만 인위적이지 않게 샘솟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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