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는 어떻게 아름다움이 되는가

조회수: 73
11월 04, 2026

글 고성연(고이와이 현지 취재)

슬로 스테이, 아즈마 팜 고이와이(AZUMA FARM Koiwai)

남들이 일본의 소도시 여행을 이야기할 때도 주로 도쿄와 교토를 오갔던 것 같다. 작은 도시들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지만 기회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도치기현 바토와 나가노현 가루이자와, 오카야마현 구라시키를 찾았다. 이번에는 이와테현이다. 호텔 생태계에서 독보적인 브랜드인 아만(Aman)을 창립한 아드리안 제차가 90대의 나이에 새로운 리조트를 선보인 곳이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문득 이와테현을 배경으로 촬영한 일본 원작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 스크린을 채웠던 자연과 느린 삶의 정취가 이곳에서도 숨쉬고 있지 않을까, 자연스레 상상하게 됐다. 역시 도쿄 출장을 틈타 도호쿠 신칸센에 몸을 싣고 모리오카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이와테산을 바라보는 고이와이 목장에 자리한 아즈마 팜 고이와이(AZUMA FARM Koiwai). 아즈마(東)는 동쪽이라는 뜻이다. 더 동쪽으로 향한 여정 끝에 일본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났다.


1
동쪽의 깊은 숲으로
모리오카역에 도착하자 셔틀을 운전할 기사가 나무 리조트 간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 초록빛 들판과 옥수수밭을 지나자 어느새 키 큰 침엽수림 사이로 접어들었다. 목장 표지판을 지나 숲길을 한참 더 달린 끝에야 리조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셔틀에서 내릴 때 작은 나무 발판을 놓아주는 세심함에서부터 이곳의 남다른 환대가 느껴졌다. 풀과 나무 내음이 은은하게 감돌고 숲의 기운이 내려앉은 곳에서, 올봄 문을 연 리조트의 제너럴 매니저(GM) 마자키 히로아키를 만나 농장의 배경 스토리를 들었다.

총면적 3,000ha 규모의 고이와이 목장은 1891년, 일본 철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노우에 마사루의 제안으로 개발되기 시작됐다. 이후 오노와 이와사키 가문이 함께 목장을 일구었으며, 고이와이라는 이름도 창립에 참여한 세 사람의 성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척박한 땅을 개척해 농업과 낙농의 기반을 마련한 역사가 오늘날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광대한 목장의 숲 한쪽, 약 8ha의 목초지에 새로운 숙박 공간을 구상한 인물이 아드리안 제차다. 그는 아만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하야세 후미토모, JR동일본과 협력해 아즈마 팜 고이와이를 탄생시켰다.

마자키 히로아키 GM과 이야기를 나누고 리조트 곳곳을 둘러보다 문득 ‘재료’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자연이 빚어낸 풍경부터 공간을 이루는 건축 자재, 식탁에 오르는 식재료까지. 아즈마 팜 고이와이를 경험하는 일은 이곳을 이루는 여러 재료를 하나씩 발견해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2
3
4



5
6
느리게 풍경을 느끼는 시간
아즈마 팜 고이와이는 자연 속에 시설을 펼쳐놓기보다, 풍경 사이에 공간을 조심스럽게 배치한 리조트에 가깝다. 라운지 & 리셉션과 메인 다이닝을 중심으로 양쪽에 단층 빌라 24채가 자리하고, 레스토랑 오키비와 사우나를 갖춘 웰빙 공간 포레스트 스프링스가 더해진다. 건물 사이로 초록빛 초원이 너른 품을 펼치고, 그 너머로는 이와테산이 묵묵히 솟아 있다. 멀리서 리조트를 지켜보는 수호신처럼.

다음 날 아침 메인 다이닝의 창가 자리에 앉아 바라본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창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완만한 둔덕이 솟아 있고, 그 위로 풀과 어린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뒤편으로는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면서도 사이좋게 들어선 숲이 시야를 채웠다. 둔덕이 시선을 가려준 덕분에 빌라가 자리할 법한 방향에서도 건물보다 자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고이와이는 일본에서 널리 사랑받는 문호인 미야자와 겐지에게도 특별한 장소였다. 이와테에서 태어난 미야자와는 농업을 공부하고 농민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 시인이자 동화 작가다. 리조트 객실마다 놓인 삽화집 <이하토보(IHATOVO)>는 그림책 작가 주나이다(Junaida)가 미야자와의 문학 세계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풀어낸 책이다. 미야자와는 1922년 고이와이 농장을 걸으며 보고 느낀 것을 장편시 ‘고이와이 농장(小岩井農場)’에 담았다.


7
8
9


그의 동화 ‘주문이 많은 요리점(注文の多い料理店)’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風がどうと吹いてきて、草はざわざわ、木の葉はかさかさ、木はごとごとと鳴りました。’
(바람이 쌩하고 불어와, 풀은 사락사락, 나뭇잎은 바스락바스락, 나무들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자연을 하나의 풍경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각기 다른 존재의 움직임으로 포착하는 감각. 고이와이의 숲에 서 있으면 이 문장이 단지 문학적 표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와 발밑의 땅,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감각에 닿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품은 숲길을 탐색하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동물들과 교감하는 일. 아즈마 팜 고이와이에서 자연은 그저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직접 발을 들이고 오감으로 경험하는 세계다.


10


이곳에서는 곱고 화려한 색조의 장식을 두른 말을 타고 천천히 산책하는 차구차구 우맛코(チャグチャグ馬コ) 승마 체험도 할 수 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땅이 젖어 있어 이번에는 다음 기회로 미뤘다. 대신 액티비티를 담당하는 외주 코디네이터의 배려로 예정에 없던 목장 방문이 이뤄졌다. 저편에는 소들이 있었고, 말들은 목을 길게 빼고 그쪽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성 트레이너가 “고이, 고이(来い、来い,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부르는 가운데 차로 말들을 몰자, 말들이 우리 쪽을 향해 힘차게 달려왔다. 프랑스산 브르타뉴종과 페르슈롱종 말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탄력도 넘쳤다. 눈앞으로 달려오는 말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목장에 울려 퍼지던 트레이너의 음색, 그 특유의 톤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자연의 감각을 공간으로 옮기다
건축가 미우라 시로는 목장의 나무와 목초지의 풀, 자연광을 활용해 고이와이의 풍경과 역사를 공간에 담았다. 설계에 앞서 목장 직원들과 숲에 들어가 건축에 사용할 수령 1백 년이 넘는 적송과 삼나무를 직접 골랐다고 한다. 목장이 오랜 시간 가꾸어온 숲의 나무를 건축 재료로 삼는 일은 이 땅이 지나온 시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이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미우라는 도호쿠 땅의 광활함과 힘, 그리고 이와테를 사랑한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도 공간에 투영하고자 했다.

메인 다이닝에 들어서면 입구의 적송 기둥이 먼저 눈길을 끈다. 고이와이 목장에서 한 세기 넘게 자란 고목이다. 실내 기둥에는 이와테산 밤나무를 사용했고, 천장은 오래된 목장의 우사를 떠올리게 하는 목재 구조로 완성했다. 목초지의 풀이 섞인 흙벽은 표면에 미묘한 질감을 더한다. 이와테산 위로 떠다니는 구름에서 영감을 얻은 조명은 일본 전통 조명 아카리를 떠올리게 한다. 숲과 초원에서 자란 재료가 실내로 이어지면서, 바깥 풍경은 창 너머의 배경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이루는 요소가 된다.

별도의 다이닝 공간 오키비(okibi, 熾火)는 메인 다이닝과는 다른 분위기를 지닌다. 붉은 소나무 기둥과 조몬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벽면, 옻칠로 마감한 사펠레 나무 테이블이 어우러진다. 같은 목장과 지역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 따라 공간의 표정이 달라진다.

숲과 목초지 사이에 자리한 객실 가구에는 오크를 중심으로 소나무와 사펠레 등 다양한 목재를 사용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창의 구조다. 미닫이창과 바깥쪽 창을 겹겹이 배치한 구조는 빛과 외부 풍경을 조절하고, 숲과의 거리감에도 변화를 준다. 자연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객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빛의 감각까지 세심하게 다룬 것이다. 포레스트 스프링스에서는 숲을 바라보며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 별도의 파빌리온 한 동을 통째로 빌려 2시간 동안 가족끼리 오붓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11
12


식탁 위에서 만나는 이와테
자연과 지역을 경험하는 방식은 식탁으로도 이어진다. 아즈마 팜 고이와이의 다이닝은 고이와이 목장과 이와테를 비롯한 도호쿠 지방의 식재료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산리쿠 해안(三陸海岸)의 해산물부터 주변 산에서 얻은 식재료와 제철 채소까지, 지역의 풍경은 계절에 따라 다른 맛으로 식탁에 오른다.

메인 다이닝의 저녁 식사는 코스 요리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선택의 즐거움을 넉넉히 열어둔다. 애피타이저와 디저트 등은 다양한 요리를 실은 왜건으로 제공되고, 메인 요리도 호로호로조(뿔닭)와 이와테 비프, 그날의 생선 등 여러 메뉴 가운데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진 요리들을 살펴보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니 어느새 거의 모든 메뉴를 하나씩 선택해 일행과 나눠 먹게 됐다. 다음날 저녁, 오키비의 오마카세는 로제 샴페인과 사케 등을 곁들여 맛봤다. 도저히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아침 식탁에서는 고이와이 목장의 우유가 인상적이었다. 180ml 유리병에 담겨 나온 우유는 신선하고 고소해, 간만에 커피를 넣지 않고 그대로 마셨다. 빵에 곁들이는 잼도 배 잼과 애플 버터 잼 등 날마다 달라 소소한 즐거움을 더했다. 직원들은 요리에 사용한 재료와 조리법을 세심하게 설명했다. 평소 즐겨 먹지 않는 클램 차우더도 지금껏 맛본 것 중 손꼽을 만큼 인상적이라고 말하자, 한 직원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기뻐했다. 지역의 먹거리를 소개하고 그 맛을 알아봐주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모습에 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총괄 셰프 오야마 요시타카(小山良孝)가 중시하는 원칙은 ‘土産適法’이다. 계절과 재료의 상태에 맞춰 가장 알맞은 조리법을 찾는다는 뜻이다. 재료에는 정직하되 조리법에는 유연한 태도. 그렇게 이와테의 식재료는 한 끼의 맛을 넘어 그 땅을 경험하는 방식이 된다.


손으로 빚은 한 그릇의 정감
여행의 기억은 때로 누군가가 건넨 작은 배려로 완성된다. 이곳에서 만난 힛쓰미(ひっつみ)가 그랬다.

한국인 배우 심형탁과 일본인 아내 사야의 아들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음식 이야기로 이어졌다. 사야의 고향 음식인 호토(ほうとう)는 밀가루 면과 채소를 된장 국물에 끓여 먹는 야마나시현의 향토 음식이다. 호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기쿠타 부주방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지역에는 호토는 없지만 힛쓰미가 있지요.”

힛쓰미는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조금씩 떼어 국물에 넣고 끓이는 이와테의 향토 음식이다. 만드는 방식도 생김새도 한국의 수제비와 거의 같다. 수제비를 먹은 지 꽤 오래된 터라 반가움이 절로 일었다. 다음날, 떠나기 전 일정표에는 없던 점심 식탁에 닭고기를 넣은 정갈한 수제비 한 그릇이 놓였다. 전날 나눈 음식 이야기를 기억한 기쿠타 부주방장이 내어준 다정한 배려였다. 한국에서는 수제비에 감자를 넣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맑은 국물을 살리기 위해 감자를 넣지 않는다고 한다. 호토에서 힛쓰미로, 다시 수제비로 이어진 대화는 정감 어린 한 끼로 돌아왔다. 자연이 내어주는 재료를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세심하게 다루며 사람을 정성껏 대하는 마음. 아즈마 팜 고이와이에서 만난 아름다움은 그런 사람들의 손길에도 담겨 있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