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위시한 수도권에 참신한 미술관이 있을까? 누군가 냉소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대답은 “그렇다!”다. 다시 꼼꼼히 살펴봐야 할 멋진 공간을 갖춘 미술관들이 여전히 눈에 띈다. 현실이 답답할 때는 시간 여행을 하러 쾌적한 공간에 머물고 싶게 마련인데, 이럴 때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괜찮은 선택지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에서 동선이 복잡하거나 디자인이 산만한 곳에는 가고 싶지 않은 법. 좀 더 ‘집’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고, 즐거운 영감을 제공하는 공간은 없을까? 자연스럽고 편안한 공간 디자인과 외부 자연환경으로 시선을 환기할 수 있는 공간을 추천한다.
최근 새로운 산업 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서울 마곡동은 ‘서울 산책’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고밀도 지역이지만 지나치게 고층으로 치닫지 않고 10층 내외의 건물들 사이에 거닐기에 좋은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격자형 도시 블록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한다리 문화공원에 스페이스K 서울이 들어섰는데, 멀리에서도 미술관 옥상으로 연결되는 구름다리가 풍경을 부드럽게 해준다. 입구에 위치한 베이커리에서 맛있는 빵 냄새를 먼저 맡을 수 있는 스페이스 K 서울은 건물 전체로 부드러운 능선이 굽이굽이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다. 미술관 내부는 능선을 따라 밖으로, 안으로 숨은 공간을 탐험하는 것 같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은 마치 하늘로 연결된 다리 같고, 높고 수직적인 주변부 도심 풍경과 무척 대조적이라 더 쉼터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한 건축가 조민석의 작품으로도 유명한 이 건물의 미학을 흥미롭게 표현한 에피소드가 있다. 스페이스K 서울을 오픈한 지 며칠이 지나 익명의 인물이 그에게 수십 장의 사진을 보내면서 어느 날 공사장을 내려다보게 되어 사진을 찍었고, 덕분에 스트레칭을 많이 했으며, 개관 뒤부터는 미술관 옥상에 올라가 스트레칭을 한다는 얘기를 전했다고. 조민석 건축가는 네모반듯하게 압축된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대조적인 곡선으로 마치 건물이 스트레칭하는 평상처럼 보여 뭉친 몸 근육을 풀고 싶게끔 하지 않았을까, 라는 즐거운 상상을 했다고 한다.
이는 미술관 건축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면과 부드러운 능선을 떠올리게 하는 아치형 문, 작은 분수, 하늘로 오르는 듯한 계단 등 스페이스K 서울은 사방이 하나의 조형 작품처럼 보이는 데다, 어디서나 부드러운 곡선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내부에서 작품을 보는 방법도 독특하다. 2층으로 올라가면 네모난 창문같이 뚫린 공간이 있는데, 거기서 1층의 작품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다. 빛을 대하는 방식도 특별하다. 날카로운 그림자에 의한 빛의 대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확산 기능이 있는 특수 유리를 전시장 천창에 적용했고,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면서 공원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한 다양한 각도의 곡면 유리창을 설치했다. 지속 가능한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지열을 이용한 친환경 건축으로 지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스페이스K 서울에서는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 작가이자 부부 네오 라우흐와 로사 로이 2인전이 개최되고 있다. 전시장에 간다면 시간을 들여서 네오 라우흐의 ‘밤의 수호자’를 보길 추천한다. 자신이 경험한 사회, 정치, 그리고 사상을 드러내는 작가도 가끔 자신만의 이야기를 꼭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마치 역사책을 보는 듯한 작품들 사이에 걸려 있는 ‘밤의 수호자’는 작가의 가장 사적인 고백 같다. 그림 속 누워 있는 작가를 바라보는 이들은 어린 시절 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작가의 근심을 덜어주고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간다. 침대 옆 화병은 실제로 작가의 선친이 드레스덴에서 구입한 화병이라니, 어쩐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뭉클한 얘기다. 전시는 1월 26일까지 개최하니 꼭 가보길. 스페이스K 서울 근처 아름다운 서울식물원과 연결해서 가도 좋을 듯하다.
2 스페이스K 서울의 건물 내부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치형 지붕을 액자 삼아 오직 하늘만 바라볼 수 있는 각도다.
3 스페이스K 서울 입구에 위치한 타원형 수반에 비친 반사광이 빛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한다.
4 현재 신 라이프치히 화파를 대표하는 독일의 부부 작가 네오 라우흐(Neo Rauch)와 로사 로이(Rosa Loy) 2인전 <경계에 핀 꽃>이 열리고 있다. 문화적 토대를 같이하지만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신비로운 주제나 서사를 다루는 네오 라우흐, 동시대 여성의 역할에 초점을 두는 로사 로이의 다른 관점과 스타일이 흥미롭다. 오는 1월 26일까지. 이미지 제공_스페이스K 서울, 1~3 Photo ⓒ신경섭
최근 일반인에게 처음 오픈한 스웨덴 대사관저 건너편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박물관이 있다. 서울 근대건축물인 국립기상박물관이다. 이곳은 근처까지 가도 쉽게 발견하기 힘들다. 기상청에서 우리나라 기상의 역사와 가치를 위해 ‘서울기상관측소 등록문화재’를 복원해 국립기상박물관을 설립했다. 레트로 감성을 그대로 살려 복원했고 지난해 개관했는데, 팬데믹을 거치면서 최근 들어 점차 인플루언서들의 성지가 되어가고 있다.
국립기상박물관은 1932년(본관),1939년(증축)에 준공된 서울기상관측소(등록문화재 제585호)의 원형을 그대로 복원한 건물에 들어섰다. 전체적으로 모더니즘 경향을 띠나 옥상의 원통형 구조물 패러핏 등에서 아르데코(1920~30년대 장식미술)적 장식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단아한 근대건축물로, 전근대의 기상관측 역사부터 현대의 발전사까지, 우리나라 기상 과학 문화의 면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박물관을 산책하다 보면 신라시대부터 하늘을 관측했고 조선 세종 대에는 각종 기구를 만들어 하늘의 변화를 살폈다는 사실이 조금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옛 사람들은 하늘의 변화에 따라 땅이 변하고 인간 세상 또한 달라진다고 믿었으니 말이다. 별자리, 달무리, 일식과 월식까지. 전시장 내부의 동선 곳곳 관람객을 배려하는 디자인이 눈을 즐겁게 한다.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역사적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VR 영상도 구비돼 있다.
국립기상박물관에서는 현존하는 5점의 측우대 중 가장 이른 시기인 영조 46년(1770)에 제작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를 실물로 볼 수 있다. 1441년부터 시작된 강우량 측정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2백여 년간 중단됐는데, 영조 대에 이르러 세종 대의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해 전국적으로 보급했다. 일제강점기 기상학자 와다 유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측우대는 경상감영의 선화당 앞뜰에 설치돼 있다가 조선총독부 기상관측소로 옮겨졌다고. 화강암의 일종인 사암으로 제작한 측우대 표면에는 한국전쟁 시에 생긴 총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삼국시대 이래 기상관측 역사를 보여주는 고문서를 통해 측후 활동을 알아보는 공간부터 과학적 강우 측정기인 측우기를 소개하고 전국적으로 펼쳐진 조선의 강우 측정 활동을 보여주는 공간까지, 이곳에서는 측우기의 우수성과 가치를 실물과 영상으로 체감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기록이 세월을 견딘 예술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국립기상박물관 앞 작은 정원 역시 하나의 작품처럼 아름답다. 이왕이면 차 없이 걸어서 가길 추천한다. 이른 아침, 작은 정원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측우기로 모으던 빗방울이 튕겨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니.
2 국립기상박물관 1층에 위치한 ‘100년 쉼터’. 마치 북유럽 미술관에 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귀여운 공간이다.
3 1932년 서울기상관측소를 그대로 복원한 국립기상박물관은 세계기상기구에서도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미지 제공_국립기상박물관
용인 호암미술관은 사계절 모두 방문해보고 싶은 미술관이다. 전시 내용도 궁금하지만 미술관으로 가는 길 풍경이 너무 근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보기 힘든 한국식 정원을 보유하고 있는데, 산속 깊은 호수를 옆에 두고 미술관까지 이어진 길에는 보물이 가득하다. 오후 3시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을 때, 화강암은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채석장이 떠오르기도 할 만큼 수많은 석탑과 석불이 가득하다. 동그랗게 웃는 동자석 한 쌍이 위치한 대낮 정원에서는 이름 모를 들꽃과 함께 마치 온돌방처럼 따뜻한 기운을 풍긴다. 우리가 석탑의 나라에 살았던 과거를 조금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문득 한여름 발리 우붓으로 향하던 길도 연상된다. 짙은 녹음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석조품. 그을린 얼굴로 묵묵히 돌을 다듬고 있는 석장의 얼굴은 발리의 자연보다 즉각적인 감동을 준다. 마치 자연의 한 부분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원시적인 돌 조각에 가까운 그것은 미술품보다 더 강렬했다. 정원의 석조품에서 나오는 온기와 빛이 이 작은 정원에 생기를 불어넣고 좀 더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얼마 전 리움미술관을 재개관하면서 앞마당에 있던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미’ 청동 조각상까지 호수 한가운데 세워놓은 것도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영화 <듄>의 세트장처럼 보일 정도다. 호암미술관은 조경으로 유명한 정영선 대표의 ‘한국식 정원’이 특히 유명하다. 한국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름다움을 인위적으로 만들기보다 주변에 있는 경치를 잘 읽어내는 것. 중국 정원, 일본 정원, 한국 정원의 차이는 인절미와 월병과 모치 맛 같은 것이라고 언젠가 정영선 대표가 말한 적이 있다. 춤으로 말한다면 승무와 경극과 가부키의 차이라고.위치조차 한눈에 드러나지 않는 장소에 정자를 두었고, 선인들은 이 정자에서 글을 읽고 음악을 하고 정치를 논했다. 그래서 정자는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의 소유가 된다. 한국식 정원의 미학은 이처럼 모든 공간이 공적인 공간으로 바뀌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용인 호암미술관으로 가는 길, 가장 깊숙한 정원에 ‘호암정’이라는 한 칸짜리 정자도 있다. 굽이굽이 산자락으로 이어진 풍경 끝에 걸쳐지는 정자는 단원 김홍도의 ‘진경 산수화’를 떠오르게 한다. 정원 입구는 깊은 죽림으로 만들어 정원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죽림에는 그동안 문화재단에서 수집한 벅수들을 대석 밑에 재미있게 배치했다. 호암미술관 전체에서 가장 중앙부에 위치한 주 정원에는 오랫동안 미술관에서 모아둔 이름 없는 다양한 석공의 석물이 배치돼 있다. 신라시대 석탑을 비롯해 거북이, 통일신라시대 삼체불, 고려시대 석불 같은 귀한 유물이다. 법연지라 이름 붙인 연못도 아름답다. 메마른 연꽃이 뒤덮은 연못은 쓸쓸하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최근까지 금에 깃든 위대한 지혜를 폭넓게 보여주는 <야금전>을 개최했는데, 미술관이 리뉴얼을 앞두고 있어서 다음 전시는 미정이다. 하지만 호암미술관의 아름다운 정원만은 언제든 갈 수 있다.
2 정원의 안쪽에 위치한 ‘호암정’.
3 용인 호암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희원’이 시작된다. 정원만 돌아봐도 아름다운 한국의 보물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2, 3 이미지 제공_호암미술관
[ART + CULTURE ’21-22 Winter SPE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