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in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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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1, 2023

지난 9월 서울을 휘몰아쳤던 키아프 X 프리즈 아트 주간의 열기가 주춤해지고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어와도 갤러리와 미술관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전시 풍경’은 여전히 손짓을 한다. 한결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기에 외려 전시 관람에는 좋은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9월 미술 주간에 미처 보지 못했거나 여유롭게 재관람하고 싶은 전시, 그새 손바뀜이 일어나 새롭게 공간을 채우고 있는 전시도 있다. 그중 이 가을, 혹여라도 놓치면 아쉬울 법한,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주는, 심지어 관람 동선이 효율적이기도 한 서울 한남동 일대의 전시를 소개한다. 설령 마지막 날이더라도, 유일무이한 시공간을 수놓는 전시의 미학을 체감한다면 ‘미술 산책’의 의미를 제대로 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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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바위가 되는 법>展 _리움미술관
다국적 방문객이 서울을 찾은 프리즈 서울 2023 기간에 리움미술관에서 우리나라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을 개최했다는 점은 ‘흐뭇한’ 타이밍의 예가 아니었을까. ‘예술가들의 예술가’로 꼽히는 김범(b. 1963)의 전시는 13년 만에 열린 개인전으로 1990년대에서 2010년대 중반을 아우르는 초기 회화, 대표 설치 연작, 최근 디자인 프로젝트까지 70여 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벽을 채운 커다란 스크린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볼거리(Spectacle)’는 1분 7초짜리 단채널 영상 작업인데, 가만히 보노라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야생동물 다큐 같은 영상에서 영양이 치타를 속도감 있게 쫓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는 11월 중순 시작되는 타이베이 비엔날레에 출품되기도 한 이 작품은 포식자와 피식자, 강자와 약자의 뒤집어진 관계를 보여주며 우리가 당연시하는 상대적 위상을 잠시라도 곱씹게 만든다. ‘풍경’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이미지 대신 파란 하늘, 나무, 강을 바라보라는 손글씨만 넣은 회화로 새로운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든지, 조선시대의 귀한 청화백자를 소재로 해 언뜻 항아리 같지만 종이 찰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볼펜으로 용 대신 스피노사우루스를 그려 넣은 엉뚱한 모조품 등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김범의 작업 세계 전반에는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무심코 받아들여지는 상식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움을 담되 소박한 표현법과 덤덤한 유머로 관람객의 긴장을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전시명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전시 장소 리움미술관(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전시 기간 2023년 12월 3일까지
홈페이지 www.le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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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저드(Donald Judd) 개인전 _타데우스 로팍 서울
오늘날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인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작가는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다. 미술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그리고 그의 이름을 모를지라도 웬만한 해외 주요 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미술관에 가보면 저드의 작품을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다. 저드는 전통적인 화가로 출발했지만 형태, 색, 재질, 공간을 둘러싼 요소들 등 오브제의 물성(物性) 자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바꾸어나가면서 캔버스 위에서 작업하며 경험한 회화적 관습에서 탈피했고 ‘빈 공간’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 도록에 실린 글을 보면, 1963년 저드가 개인전을 열었을 때 그의 작업은 이미 ‘상자들’, ‘배열’ 같은 개념적, 분석적, 수행적 어휘로 이뤄져 있었다고 한다(유진상). 그리고 1966년 뉴욕 유대인 미술관에서 열린, 예술의 판을 흔든 중요한 역사적 전시에서 무제의 박스 형태 작품들을 선보였다. 정작 자신은 ‘미니멀 아티스트’로 한정되는 걸 거부했고, 커리어 후반부에는 뉴욕의 미술 생태계에 염증이 나 황량한 풍경이 펼쳐진 텍사스 서부의 외딴 마을 마파(Marfa)로 이주해 여생을 보냈다. 도널드 저드 재단을 이끄는 그의 아들이자 예술 감독 플래빈 저드는 이번 개인전 기획을 맡았는데, 직접 쓴 전시 도록의 서문에서 ‘세상은 원자와 빈 공간뿐, 나머지는 모두 의견이다’라는 그리스 철학자의 말로 시작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저드의 작업 세계에 초석이 된 보기 드문 회화 작품을 3차원 작업과 함께 소개하고,1991년 개념화한 20점의 목판화 세트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선보였다. 목판화 세트는 10대 후반 주한 미군 공병으로 근무해 한국과의 인연이 남달랐던 저드가 판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던 재료인 한지에 찍어낸 작품들이다. 이 세트가 유난히 길게 뻗은 갤러리 공간에 걸린 모습을 본다면 한지의 물성에 매료됐고 그토록 ‘공간’을 중시한 완벽주의 ‘메이커’ 저드가 뭐라고 말했을지 궁금해진다.


전시명 도널드 저드 개인전
전시 장소 타데우스 로팍 서울(서울시 용산구 독서당로 122-1)
전시 기간 2023년 11월 4일까지
홈페이지 https://ropa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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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길릭(Liam Gillick) <The Alterants(변화의 주역들)>展 _갤러리바톤
대개 작가의 커리어를 아우르거나 중요한 시기의 작업 세계를 심도 있게, 그리고 보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미술관 기획전과 달리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작품을 판매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상업 화랑, 그러니까 갤러리의 전시가 흥미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 관심을 가져온 작가의 신작을 접할 때도 그렇다. 영국 출신의 작가 리암 길릭(Liam Gillick, b. 1964)은 갤러리바톤과의 세 번째 개인전인 <The Alterants(변화의 주역들)>에서 아마도 연작으로 이어질 작업의 시작점이 될 신작을 처음 선보였다. 어지럽도록 쨍하게 백색광을 발하는 라이팅 부조 작품 옆에 말풍선 속 수수께끼 같은 그래픽 기호가 나란히 ‘세트’를 이루고 있다. 이 세트가 갤러리바톤의 주 전시장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데(말풍선 속 기호는 다 다르다), 여전히 시선을 고정하게 하는 단순하면서 매력적인 비주얼이지만 단번에 의도를 알아채기에는 아리송한 구성이다. 작가의 긴 설명을 압축해보자면 변화의 물결이 닥친 포스트 산업 시대에 걸맞은 시각화된 새로운 기호 체계를 모색하면서 시도한 ‘새로운 추상’이란다. 라이팅 부조는 경량 알루미늄(T 슬롯)과 후면에 숨겨진 LED 라이트를 결합한, 산업적 재료로 만든 구조체로서 AI, 바이오 메디컬, 가상현실, 반도체 등 ‘포스트 산업 시대가 새롭게 도래하고 있음에 대한 표지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한다. 이 구조체와 이웃하는 말풍선 속 그래픽 기호는 거의 한 세기 전에 고안된 아이소타이프(Isotype)를 바탕으로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냈다. 아이소타이프는 복잡한 통계 정보를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고자 고안한 인포그래픽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만의 화법과 방식으로 새로운 추상을 향해 나아가는 리암 길릭을 보면 도널드 저드와의 접점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전시명 리암 길릭(Liam Gillick) 개인전 <변화의 주역들(The Alterants)>
전시 장소 갤러리바톤(서울시 용산구 독서당로 116)
전시 기간 2023년 11월 11일까지
홈페이지 www.gallerybat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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