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BTQ 현대미술, 역사적 전개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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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 2017

글 임근준(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저마다의 서사로 편견을 깨면서 의미 있는 자취를 남겨온 영국, 미국과는 또 다른 방식과 결을 지닌 한국의 퀴어 아트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나래를 펼치고 있다. LGBTQ 현대미술의 태동과 전개, 그리고 한국 퀴어 아트의 현주소를 미술 연구자 임근준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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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명예 회복이 이뤄지고 있는
영국식 LGBTQ 서사
흔히 ‘퀴어(queer)’로 통칭되는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 미술을 다룬 초기 논객들은 과감하게 르네상스 시대나 그리스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사실 현대적 의미에서의 동성애라는 개념과 인식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널리 유포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동성애의 인격화가 이뤄지고 난 다음에야 동성애자라는 하위 주체로서의 정체화를 위한 기제(機制)가 성립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예컨대 ‘게이’라는 용어는 1920년경에야 등장했다). 하지만 1895년 아일랜드의 문필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자신의 동성애를 법정에서 스스로 변호하고 나선 사건을 되짚어보면 현대적 동성애자로서의 자의식은 이미 19세기 말 무렵 식자층에 널리 형성,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동성애자 문화는 주류 사회의 가치와 심하게 부딪혔다. 영국의 아르누보와 운명을 함께한 오스카 와일드와 삽화가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의 퇴폐적 유미주의는 결국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를 이겨내지 못했다. 보수적 영국인들은 당시 오스카 와일드와 그의 동료들이 추구한 현대성을 썩어빠진 대륙에서 전염된 외래문화라고 확신했고, 이후 영국 사회는 오래도록 아방가르드를 용인하지 않는 폐쇄적 자세를 유지하게 된다.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는다. 영국인들은 아방가르드 예술에 호모포비아(homophobia, 동성애 혐오)를 투사했노라고.
따라서 동성혼 법제화 시대를 맞은 오늘날의 영국 땅에서 출간되는 관련 연구서나 전시는, 오스카 와일드의 복권(復權)과 명예 회복에 방점을 찍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억울하게 스파이로 몰린 과정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탄압받다가 자살한 비운의 천재 과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사건을 위시한 온갖 과거사 문제도 포괄할 수 있고, 용감하게 ‘게이 감수성’을 표현한 프랜시스 베이컨을 영웅시할 수도 있으며, 영국식 팝아트의 의제를 미국에 전파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를 미술사의 왕좌에 앉힐 수도 있다. 또 에이즈(AIDS) 암흑기로 불릴 정도로 대위기를 겪은 1980년대에 정치적 역병의 가시화와 사회 의제화에 앞장선 2인조 작가 그룹 길버트와 조지(Gilbert & George)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한 대표적인 예가 지난 4월 런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개막한 <퀴어 브리티시 아트(Queer British Art 1861-1967)>전이 되겠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국식 서사다.

동성애 인권 운동을 촉발한 ‘스톤월 항쟁’
미국식 서사에서 중요한 기준점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 전,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에 일어난 ‘스톤월 항쟁’이다. 1969년 6월 28일 새벽,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게이 클럽인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서 성 소수자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시작된 이 소요 사태는 전후 미국 게이 사회의 정치적 각성을 이끌었다(스톤월 인은 지난해 국가기념물로 지정됐다). 이를 기점으로 현대적 양태의 성 소수자 인권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므로 미국인들은 ‘1969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출간되는 LGBTQ 미술 연구서나 이를 바탕으로 기획되는 역사 회고전도 1969년 이전과 이후를 나눠서 고찰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스톤월 혁명 이후 북미 지역에서 전개된 LGBTQ 운동은 커밍아웃을 앞세워 ‘가시화(可視化) 증진’ 전략을 추구했다. 따라서 스톤월 혁명 이전의 LGBTQ 예술을 고찰할 때도, 미국인들은 가시성을 키워드로 삼으려고 하는 편이다. 대표적인 예가 2010년 미국 국립초상화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에서 열린 <숨기기/찾기: 미국인 초상에서의 차이와 욕망(Hide/Seek: Difference and Desire in American Portraiture)>전이다.
연구를 통해 게이 정체성이 확인된 미국 사실주의 거장 토머스 이킨스(Thomas Eakins, 1844~1916)와 초상화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초상으로 시작한 이 전시는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활약했던 인물을 거쳐 전후 현대미술의 영웅인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 애그니스 마틴 등을 망라했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단연 강조된 기점은 역시 1969년 스톤월 혁명! 1970년대에 하위문화의 요소를 전유해 하이 아트(high art)를 오염시키는 전략을 구사한 게이 미술가들에게 주목하고, 그들이 1980년대의 에이즈 대위기에 맞서 싸운 역사 자체를 영웅시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전시의 진짜 주인공은 커밍아웃한 성 소수자나 그에 준하는 주변인으로서 주류 사회의 가치 변화를 이끌어낸 키스 해링, 데이비드 워나로비츠,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캐서린 오피 등의 아티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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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포스트모던 LGBTQ 작가들
전후 모더니즘에 반발한 북미 포스트모던 1세대 LGBTQ 미술인들은 다양한 기호학 이론과 문화 비평 이론을 동원해가며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전유해 원본을 비평하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진 이론으로 대전환의 모멘텀을 일군 이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사진 이론가 수전 손태그(Susan Sontag)였다(그의 연인 가운데 한 명이 스타 사진가 애니 레보비츠였다). 또 퀴어 이론가로 활약한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는 사진술을 이용해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전유함으로써 새로운 기호학적 메타-비평으로서의 다매체 미술을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을 담론과 큐레이팅으로 입증해냈다. 크림프의 지원을 받아 1980년대의 문제적 작가로 떠오른 이가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로 통하는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다.
20세기 후반기에는 LGBTQ 미술의 판도가 크게 변화했다. 1980년대 후반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의 게이 미술가가 연이어 세상을 뜨고 199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탈냉전 시대가 펼쳐진 데 따른 현상이었다. 미셸 푸코의 후기 구조주의 이론을 대전제로 앞세운 ‘퀴어 미학’의 득세에 힘입어 최후의 왕좌를 차지한 주인공은 쿠바계 이민자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였다. 정치적 개념 미술가들의 협업체였던 그룹 머티리얼(Group Material)에 참여했던 그는 큐레이터이자 작가로서 리더십을 발휘한 줄리 얼트(Julie Ault)에게 정치적 개념 미술의 방법론을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제거한 상황에서 퀴어 미학의 논리를 성립시키는’ 특이한 전략을 고안해냈다. 여타 LGBTQ 미술가들이 하위문화의 자극적 이미지로 주류 사회를 도발해온 것과는 정반대 행보였다.
2000년대에는 유로화 시대의 유럽에서, 관계 미학의 방법을 활용해 예외적 영역을 개척하는 ‘포스트 퀴어(post-queer)’ 미술가가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올해 이스탄불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기도 한 덴마크와 노르웨이 출신의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과 드라그세트(Elmgreen & Dragset). 전 지구화라는 21세기의 문제적 현실에 대응하는 상황을 연출해온 이 스칸디나비안 듀오는 미술 전공자가 아닌 자신들의 배경(엘름그린은 시인, 드라그세트는 연극 연출가 출신)을 일종의 특권으로 삼아 현대미술계 자체를 풍자하는 방식으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웹툰, 그래픽, 동양화…
’마이웨이’를 걷는 한국식 LGBTQ 시각 문화
’마이웨이’를 걷는 한국식 LGBTQ 시각 문화
그렇다면 한국의 21세기 LGBTQ 미술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일단 눈에 띄는 경향은 ‘만화’다. 특히 웹툰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득세하는 가운데 게이 만화를 통해 독자층을 확보해나가는 창작자 진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2007년 결성된 이래 퀴어 만화 동인지를 제작하는 아마추어 게이 만화가 그룹인 ‘프로젝트 웅’이 있다. 현재 인지도를 꿰찬 인기 만화가는 2인. 공학도 출신으로 학습지 만화체를 바탕으로 ‘동성극장’을 연재하며 한국식 게이 코미디를 펼치고 있는 변천(1976년생), 그리고 ‘로맨스는 없다’라는 히트 작품으로 알려진 작가이며 순정 만화 정서로 게이 만화를 창작하고 있는 이우인(1983년생)이다. 둘 모두 전시 활동을 병행하고자 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이우인의 출판 기념 사인회에는 많은 게이 팬이 모이기도 했는데, 이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만화와 유사한 일러스트레이션의 어법으로 회화 작업을 전개하는 전나환(1984년생)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정식으로 커밍아웃하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테마로 창작 활동을 펼쳐나가는 작가로는 네 번째 정도 되는 젊은 작가다. 변천, 이우인, 전나환 모두 게이 운동 조직과 에이즈 운동 단체를 위해 꾸준히 창작하며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점도 앞 세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도 나름의 방식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그룹이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 ‘퀴어 미감’을 드러내는 창작을 시도하는 이가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특출한 사례는 햇빛서점을 설립한 디자이너 박철희(1988년생)를 꼽을 수 있다. 국내 1호 퀴어 서점으로서 LGBTQ 관련 서적, 굿즈 등을 판매하는 햇빛서점은 LGBTQ 공동체의 대안적 거점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한다. 최근 ‘햇빛학교’라는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고 ‘햇빛총서’ 제1권 <목사 아들 게이>를 출간하면서 서울 한남동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작은 규모로나마 출간 기념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미학적 차원에서 보다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진영이 있다. 흥미롭게도 전통 회화의 ‘퀴어한’ 측면을 전유해 다시 퀴어화를 이뤄내는 동양화가들이다. 이 계열에서 제일 앞선 행보를 펼친 작가로는 퀴어 어법을 포스트-퀴어의 차원에서 구사해낸 이성애자인 동양화가 김화현(1978년생)이 있다. 반면 전통 불화의 어법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표출되는 게이 남성들의 나르시시즘’을 포착하기 시작한 남성 게이 화가 박그림(1987년생)은 그에 대비되는 기대주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미술’로 꽤 유명한 ‘포스트-포토리얼리스트(post-photorealist)’ 화가 정중원(1988년생)도 특이한 사례다. 언뜻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세밀하고 극명한 화면 구성을 하는, 흔히 접할 수 있는 포토리얼리즘 계열의 그림을 그리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이상이다. 조각상으로만 모습이 전해져온 과거의 인물에 사진으로 수집한 피부 정보를 적용함으로써 가상적 하이퍼리얼리티 초상화를 완성해내는 과정은 상당히 ‘퀴어-연극적’이다. 독자적 문법을 형성하는 과정이므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정중원의 초상 연작은 셰익스피어 연극광인 그의 면모와 연관성을 지니는 듯하다. 셰익스피리언 게이들이 기존 서사의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은유하는 일을 즐겨온 것처럼 그는 캐릭터의 가짜 현존성을 구현하는 포토리얼리즘의 어법으로 가시적 정체성의 표피와 그 이면을 탐구하고 있는 것 같다.이렇듯 국제적 조류와 무관하게 한국식 LGBTQ 시각 문화는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토착적 차원에서 새롭게 싹을 틔우고 있다. 1970년대 후반생과 1980년대생 창작자가 주도하는 이 흐름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그리고 1990년대생 창작자는 이에 어떤 식으로 결합하게 될지, 다른 어느 지역과도 다른 한국의 퀴어 미술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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