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기술을 포용하는 동시대 극장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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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4, 2026

글 고성연(타이중 현지 취재)

타이중 국가가극원(NTT) 2026 아츠 노바(Arts NOVA) 시리즈

대부분의 문화 예술 공간이 그렇듯 동시대 극장도 기술·사회·관객 경험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흐름을 품고자 창의적인 몸부림을 친다. 정해진 좌석과 시나리오 없이 ‘몰입형(이머시브) 시어터’라는 장르를 부각시킨 ‘슬립노모어’ 같은 관객 이동형 공연이라든가, 휴머노이드 로봇 에버(EveR)를 지휘자로 세운 관현악 공연 ‘부재(不在)’나 VR과 공연 예술의 접목을 시도한 ‘관현악의 기원’ 같은 우리나라 국립극장의 시도 역시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하는 일례다. ‘국립’, ‘시립’처럼 공공 플랫폼일 경우에는 대중적인 오락성을 갖춘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도 묵직한 의제를 다루는 사회적 담론의 장, 그리고 혁신적인 실험극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토대로서의 역할도 해내야 한다. 대만 타이중에 자리한 국가가극원(NTT)의 연간 프로그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체 몇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나, 싶을 정도로 다채롭고도 균형 잡힌 스펙트럼에 반하게 된다. 건축부터 전형적인 ‘상자형’에서 벗어난 NTT는 기술과 예술을 새로운 감각과 방식으로 버무리는 첨단화와 현장성과 육체성에 증점을 둔 극장의 오래된 본질을 동시에 추구하는 듯하다. 두 방향성이 서로를 억누르거나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거나, 심지어 북돋기도 한다. 특히 2023년부터 해마다 봄을 수놓고 있는 ‘아츠 노바(Arts NOVA)’ 시리즈는 이러한 면모를 잘 드러내는 시즌제 프로그램이다. 동시대 극장다운 모색 속 여정을 절로 응원하게 되는 NTT의 봄을 함께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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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우 추상적인 방식으로 작업하지만, 결국에는 관객이 공연과 자기 자신을 연결 짓기를 원합니다”
_럭셔리로지코


대만 중부를 떠받치는 ‘허리’ 도시 타이중의 대표적인 신도심인 시툰구(西屯區, Xitun District)에 터를 잡고 공식 개관을 알린 지 10년이 된 국가가극원(National Taichung Theater, 이하 NTT). 전통 경극(오페라)부터 민속음악, 뮤지컬, 클래식, 무용, 아트 & 테크 등 다양한 공연 스펙트럼을 지닌 시민의 전당이다. 일본 건축 거장 이토 도요(Toyo Ito)가 설계한 랜드마크인 만큼 자연스레 이끌렸는데 작년 늦가을, 처음 이 극장을 찾았을 때 마침 ‘건축 투어’부터 하게 됐다. 겉모습을 보면 우아한 와인잔 혹은 보틀의 형상을 닮은 파사드가 눈길을 사로잡고, 내부는 마치 유기적인 동굴 형태처럼 곡선으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데, 공간 경험 자체를 풍요롭게 해주는 몰입형 설계가 인상적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시기가 맞아 2천 석 규모의 대극장 객석을 거의 채울 만큼 화려한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경극 한 편을 봤고, 몇 주 만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겨울 시즌 국제 프로그램 하이라이트인 다큐멘터리 연극 ‘The Making of Berlin’을 중극장(플레이하우스)에서 관람했다. 영화와 연극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하는 벨기에 그룹 베를린(BERLIN)이 연출한 작품으로, 나치 시절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둘러싼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갈수록 긴장감 있게 풀어내는 전개 방식과 구성이 조만간 한국에도 들여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참신한 수작이었다.



아트×테크, 새로운 공연 경험에 초점을 맞추다
그리고 올봄, 동시대 미술을 주로 다뤄온 직업 때문인지 아무래도 제일 관심이 가는 NTT의 봄 프로그램인 ‘아츠 노바(Arts NOVA)’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기회가 찾아왔다. 크로스오버 창작과 헤드폰, 모바일 앱, 이동형 공연 등을 적극 활용한 관객 참여형 ‘체험’, 포스트휴먼·AI·생태 위기 같은 동시대 이슈를 탐구하는 실험·융합 예술 시리즈다. 2017~2022년에는 NTT-TIFA라는 기존의 국제 예술제 프로그램(2017~2022)을 개편·리브랜딩한 것으로 아츠 노바 체제 이후로는 이머시브, XR/VR, 인터랙티브, 디지털·미디어 기반 경험 중심으로 방향성을 더 선명하게 하고 있다. 봄 시즌의 NTT를 동시대 실험 플랫폼으로 재정의한 셈에 가깝다. 올봄 아츠 노바 시리즈에서 세 편의 작품을 ‘경험’했는데, 첫 번째는 NTT ‘이머징 아티스트 프로젝트(Emerging Artists Project)’로 선정된 대만 아티스트 레이쩡(Ray Tseng)과 훙치엔한(Hung Chien-han)의 AI와 인간 관계를 다룬 공동 연출작 ‘As One’. AI 챗봇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연구자의 실제 비극에서 영감받았다는 이 작품은 타이베이에서 4월 중순에 열린 리허설을 통해 만나봤다(지난 5월호 글 참고). 실제로 ‘커플’이기도 한 2명의 젊고 패기 넘치는 연출자는 아예 챗GPT를 세 번째 연출자로 삼아 협업하는 방식으로 전개하고 인간(배우)과 아바타를 화면에 같이 등장시키는 이 독특한 실험극을 한 달쯤 뒤에 NTT 소극장(블랙박스) 무대에서 선보였다. 이어 타이중으로 이동해 NTT 무대에서 직접 관람한 두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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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더 셸터’,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세 가지 서사
작년에 이어 플레이하우스에서 만난 또 하나의 글로벌 투어작은 프랑스 연출가 조리스 마티외(Joris Mathieu)와 오 에 쿠르(Haut et Court) 컬렉티브가 공동 창작한 ‘히키코모리: 더 셸터(Hikikomori: The Shelter)’ 였다. 이 작품 역시 아츠 노바가 지향하는 동시대 공연의 확장된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로, ‘경험 방식’ 자체가 눈에 띄는 작업이다. 관객은 입장과 동시에 3개의 서로 다른 이어폰 버전 중 하나를 랜덤으로 부여받고, 아이·아버지·어머니 중 한 시점을 따라가며 동일한 사건을 각기 다른 세계로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를 봤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극본을 쓰고 공동 연출을 맡은 조리스 마티외는 현지에서 가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처럼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동일한 사건이 각자의 시점과 감정에 따라 얼마나 다른 현실로 분열될 수 있는지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더 가까워 보인다.

이 작품은 일본 사회의 ‘히키코모리’ 현상에서 출발하지만, 실제로는 가족 내부의 단절과 소통 실패를 다층적으로 변주하는 구조에 가깝다. 스스로 세상과 벽을 쌓는 소년 닐스를 중심으로 한 고립의 서사는 점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3개의 독립된 인식 체계로 확장된다. ‘3개의 고독(three solitudes)’이라는 조리스 마티외의 설명처럼, 이 작품은 고립을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로 제시한다. 하지만 서사 자체의 충격도, 문제의식도 아시아 관객의 관점에서는 다소 익숙한 지점에 머문다. 학교 폭력과 교육 경쟁, 사회적 은둔 같은 문제는 이미 여러 콘텐츠를 통해 반복적으로 소비되어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작품의 강점은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에 있다. 관객이 같은 사건을 ‘각자 다르게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연 이후에야 깨닫는 구조는, 하나의 진실이 아닌 복수의 진실을 동시에 체험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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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스트 퀘스천’, 극장을 살아 있는 감각 장치로 바꾸다
올해 아츠 노바 프로그램의 진면목을 가장 잘 드러냈다고 여겨지는 작업은 대만 아티스트 컬렉티브 럭셔리로지코(LuxuryLogico)의 극장 데뷔작인 ‘더 라스트 퀘스천(The Last Question)’이다. 조형, 기계 설치, 공간, 사운드,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기술과 감각의 접점을 탐구해온 이들은 지난해 타이베이 현대미술관(MOCA Taipei)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기도 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를 매체로 삼았다. 그리고 ‘무인 극장’을 택했다. 공연이 열린 대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익숙하게 알고 있던 객석과 무대의 관계는 이미 뒤집혀 있다. 관객은 기존의 무대 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극장과 관객의 위계가 흐려진달까.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배우 대신 빛과 구조물, 소리와 기계장치가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한다. 객석은 어느 순간 거대한 감각 실험실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극장은 더 이상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 관객의 감각과 기억을 작동시키는 유기적 시스템처럼 변모한다.

공연의 핵심 이미지이자 장치는 한 쌍의 커다란 손이다. 이 기계적 손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며 사물과 빛을 조작하고, 마치 어떤 존재가 세계를 더듬거나 기억을 재조립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어 등장하는 반짝이는 ‘빛의 구’는 공중에 떠다니며 감정과 시간, 선택의 흐름을 연결하는 중심축 역할을 한다. 극의 흐름 자체는 단순하다. 거창한 서사를 직설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딸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이 깃든 평범한 일상이 자연과 우주의 이미지로 확장되고, 어느 순간 지구의 위기로 모든 것이 소멸해버린 절망적 상황을 연상시킨다. 빛의 구가 유려하게 춤을 추면, 관객은 개인적 기억과 우주적 사유 사이를 오가며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극은 ‘마지막 순간 다시 시작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기술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또 다른 언어
이 작품은 약 60분 동안 인터미션 없이 진행되는 극장형 ‘기계 시(機械詩)’에 가깝다. 기계적 구조와 추상적 이미지를 통해 관객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호출한다. 인간 배우의 부재는 오히려 감각의 밀도를 극대화한다. 움직이는 오브제와 기계장치는 이상하리만큼 감정적인 존재처럼 느껴진다. 기술은 전면에 드러나지만 결코 과시되지 않는다. 바로 기계 미학이 극장의 ‘본질’을 희석시키지 않고 외려 강화하는 경우다. “우리는 매우 추상적인 방식으로 작업하지만, 결국에는 관객이 공연과 자기 자신을 연결 짓기를 원합니다.” 공동 창작진은 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는 딸이 될 수도 있고, 아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관객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죠.”

이러한 세계관은 팀 이름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럭셔리로지코(LuxuryLogico, 豪華朗機工)는 얼핏 장난스러운 합성어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유쾌하지만 나름 치밀한 구조에서 탄생한 이름이다. 한자 표기인 ‘豪華朗機工(호화랑기공)’에서 ‘豪華(호화)’는 고인이 된 단장 장경화(張耿華)와 그의 형 장경호(張耿豪)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왔다. 여기에 동창생 2인조 그룹인 ‘로지코(Logico)’의 멤버 린쿤잉(林昆穎), 천즈젠(陳志建), 천이(陳乂)가 합류하며 2010년 현재의 팀이 결성됐다. ‘朗機工(랑기공)’은 기존 팀명 ‘Logico’를 단순히 음역한 표현이 아니다. 사고방식 자체를 한자 구조 안에 재설계한 개념에 가깝다. ‘朗’은 밝고 열린 사고를, ‘機’는 시스템과 메커니즘을, ‘工’은 제작과 공학을 의미한다. 결국 ‘luxury’의 감각성과 ‘logico’의 시스템적 사고가 교차하는 이중구조인 셈이다. 하나의 의미로 한정 짓지 않고, 읽는 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층위를 활짝 열어내는 이들의 작업 세계와도 닮았다.

키네틱 아트와 사운드, 기계 구조물,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구축하는 이들의 작업은 ‘시적인 기계 미학’이라는 점에서 한국 작가 권병준을 떠올리게 한다. 정교하게 설계된 조명 네트워크와 기계 시스템 아래에는 상실, 관계, 기억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서가 흐른다는 공통분모도 있다. 최근 해외 무대에서도 점차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는 럭셔리로지코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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