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18 SUMMER SPECIAL] 외부에 있는 나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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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4, 2018

글 심은록(미술 기획·비평가)

한국인이라면 상당수가 친근함을 느낄 법한 ‘숯’이라는 재료를 통해 동양화적 기법과 느낌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으로 꾸준한 활동을 펼쳐온 이배(Lee Bae). 프랑스를 중심으로 국제 무대에서도 활발한 행보를 보여온 그가 지난봄에는 특히 더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에 있는 주요 전시장 두 곳에서 결이 서로 다른 개인전을 동시에 가진 작가 이배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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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e art documentation for Perrotin photographed and edited by Claire D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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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은 ‘숯의 작가’로 불리는 이배(Lee Bae, 1956~)의 행보가 유독 주목되는 계절이었다. 이배 작가의 전시가 프랑스 미술 생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곳에서 거의 동시에 개최됐기 때문이다. 바로 파리에 있는 페로탱 갤러리(Galerie Perrotin)에서 지난 3월 17일부터 5월 26일까지 열린 <블랙 매핑(Black Mapping)>전, 그리고 남프랑스의 작고 아름다운 성곽도시 생폴 드 방스에 위치한 마그 재단(Fondation Maeght)에서 3월 24일에 시작해 최근(6월 17일)까지 석 달 가까이 이어진 <좀 더 빛을(More Light)>이라는 전시였다.
프랑스 미술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한 작가, 두 전시
파리에 본점을 둔 유력 갤러리 페로탱의 설립자 에마누엘 페로탱(Emmanuel Perrotin)은 마우리치오 카텔란, 무라카미 다카시처럼 현대미술계에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을 발굴했고, 그들이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예리한 안목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이배 작가에게 주목했다. ‘예술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파리 마레 지역에 자리 잡은 페로탱 갤러리에서 열린 <블랙 매핑>전. 말끔한 화이트 큐브의 전형적인 전시 공간에서 이배 작가의 숯 작품은 국제적인 감각으로 전시 가치를 최대한 드러내며 많은 이들의 기대에 어김없이 부응했다.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 벽은 ‘화선지’이고 이배의 숯 작품은 ‘먹’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오랜 시간 다져진 필력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강력하고 세련되어, 전시장 전체가 한 폭의 산수화 같았다. 모든 빛을 다 품고 있는 검은색의 화려함과 단정함의 상반된 매력이 잘 드러났다.
전시 풍경이 예상 가능했던 페로탱 갤러리와는 달리, 호안 미로(Joan Miro)의 작품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정원을 둔, 알록달록하고 동화 같은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독특한 풍경을 지닌 마그 재단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선뜻 예측하기 어려웠다. 두 전시를 앞두고 있던 지난 2월 초, 이배 작가의 고향이자 아틀리에가 있는 청도를 방문했을 때, 필자의 궁금증은 마그 재단 전시에 집중됐다. 작가는 “뉴욕 모마처럼 도심에 위치하지 않고, 소나무 숲과 어우러지는 마그 재단은 미술관이면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수도원 같은 숭고함이 더해진다”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상당히 인상적인 언급을 했다.
“뉴욕 모마(MoMA)에서 자코메티의 조각을 보면 도시인이나 현대인의 초상화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조각인데도 마그 재단 미술관의 자코메티 작품을 보면 육적인 것이 제거된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요.”
마그 재단 미술관에는 미술 애호가라면 익히 잘 알고 있는 ‘걸어가는 사람’이 여러 점 있었고, 이배의 말대로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코메티의 새로운 오라가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이배의 숯 작품도 파리에서와 달리 뭔가 영적인 기운을 품은 듯 보였다.
숯의 미학
숯과의 인식 관계로 볼 때 이배의 예술은, ‘숯의 존재를 바로 인식할 수 있는 작품’, ‘숯을 인식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작품’, 그리고 이배의 숯 예술을 잘 알지 못하면 ‘숯의 존재가 간과될 수 있는 작품’,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관람객들이 한눈에도 숯의 재질감과 형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예를 들어, 이배의 숯 덩어리 작품이 마그 재단 미술관의 뜰 여기저기 소나무 밑동에 걸쳐져 있다. 왠지 능청맞다고 할 정도로 소나무와 작품이 잘 어울린다. 불과 며칠 전에 설치된 작품임에도,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있었던 것 같고, ‘웬 숯 덩어리가 여기에 있을까’ 하는 질문도 던질 수 없을 정도로 묘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미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전시실에는 설치 작품 ‘풍경’이 자리하는데, 전시실 바닥에 펼쳐져 있는 숯 덩어리들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다양한 색의 빛 아래 일광욕이라도 하는 듯 누워 있다.
두 번째, ‘불에서 나온’이라는 제목의 회화 작품은 캔버스 위에 절단한 숯들을 나란히 놓고 접합한 뒤 표면을 일정하게 연마했기에 그 마티에르가 숯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다소 관찰이 필요하다. 수백 겹의 나뭇결과 나이테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빛이 각각 다른 방향과 다른 각도로 반사된다. 검은 것만 같았던 숯에서, ‘빛의 백과사전’처럼 다양한 빛이 수없이 전개된다. ‘불에서 나온’ 이 숯들의 나이테가 그대로 보이며 나무의 체취가 남아 있는 작품이라면, 또 다른 회화 작품 ‘풍경’은 숯가루를 짓이긴 다음 메디엄(medium)을 사용해 화면에 두껍게 붙인 작품이다.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신체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숯의 물질감, 질량감, 형태나 볼륨감을 강하게 뿜어낸다.
세 번째, 이배 작가의 최신 작품 ‘무제’에서는 숯의 개입이 앞에 설명한 작품들보다 훨씬 더 은밀하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형태 같기도, 혹은 형태보다는 일종의 부호나 기호 같기도 하다. 어설픈 선이 무언가를 표현하려다가 중간에 멈춘 듯한 인상을 준다. 거대한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 것 같은 형태도 있는데, 자세히 보면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처럼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붓으로 정교하게 그린 결과다. 모든 모티브는 각각 화면 저 아래 있는 것 같기도, 표면에 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그가 메디엄이 섞인 숯가루로 모티브를 그린 뒤 메디엄만으로 한 레이어를 덮고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이미 그린 모티브를 따라 똑같이 그린 뒤 또다시 메디엄을 바르는 과정을 세 번 반복하면서 발생된 효과다. 모티브들은 작가가 매일 규칙적으로 이러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티브나 몇 년 전에 그린 모티브와 비슷한 형태가 다시 나오기도 한다. ‘의식적인 기억’도 있지만, 의식으로 표현해낼 수 없는 몸, 행위의 기억도 있다.
이배의 ‘무제’는 ‘신체가 담고 있었던 기억의 파편들’이며, 이를 지속적으로 정제해가는 과정이 그의 작업이다. 작가는 “현대미술은 ‘영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태도나 과정에서 나온다”라고 말한다. 이전에는 예술가가 여행을 하거나 특별한 감성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면, 오늘날은 동일한 행위를 일정한 시간 내에 규칙적으로 지속 반복하면서 예술 세계를 조금씩 구축해간다는 얘기다.
기억의 마티에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프랑스의 세계적인 문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에 담긴 비자발적인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이배에게 숯은 그의 고향 청도에서 흔하디흔했던 숯, 고국 한국과 관련된 기억의 마티에르다. 또 최초의 인류가 동굴에서 숯을 사용해 최초의 그림을 남긴 예술에 대한 원초적인 본능과 그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배는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자신의 기억을 찾아내, 숯이라는 자연 물성과 인간 감성의 교차점을 미술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기억’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과거의 사건보다도, 감각, 신체, 공간과 관련된 무의식적 요소를 드러나게 한다. 두 곳에서 같은 작가의 전시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인용해 표현하자면 파리 도심에 있는 페로탱 갤러리의 깔끔하고 세련된 화이트 큐브 전시장에서 숯 작품의 보편적인 느낌을 자아내면서 ‘전시(展示)의 가치’를 보여줬다면, 마그 재단에서는 ‘제의(祭儀)의 가치’ 를 느끼게 하며 ‘오라의 복귀’를 요청하는 듯했다. 이배는 모든 빛을 품고 있는 숯에서 오래 전에 우리가 잊어버렸던 신성한 예술의 빛인 ‘오라’를 꺼내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처럼 그는 우리에게 숯의 물성과 잠재성을 끊임없이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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