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조끼를 입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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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 2020

글 김동현(런던 새빌 로의 한국인 테일러) | edited by 장라윤

현대사회에선 재킷과 바지를 조끼와 곁들여 입는 수트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끼를 입는 데 주저함이 없는 영국인들. 이들은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일까?.


나는 눈앞에 활짝 열린 작업장 창 너머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메이페어의 짧은 거리엔 저마다의 리듬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으로 가득하다. 양복지를 누르는 열과 습기가 만들어내는 비릿한 냄새, 비 오는 날 런던 특유의 습한 느낌은 작업 도중에 이따금 나의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게 한다. 시선이 허공으로 옮겨 갈 때쯤엔 또다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조끼에 대한 잡념에 골똘해졌다. 재단이 끝나고 봉제를 기다리는 옷감 뭉치 중 조끼가 제일 많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들은 왜 이토록 조끼를 사랑할까’ 하는 의문에 휩싸였다.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Alberto Moravia)의 말이 떠오른다. “조끼같이 용도가 분명한 옷은 바로 그 필요성 때문에 의미가 없어진다”. 모라비아의 표현대로 그 시절엔 조끼 착용이 필수였기 때문에 별 의미를 찾기 어려웠나 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그의 의견에 온전히 찬성하진 못하겠다. 어떤 나라에서는 시대극에만 등장하는 유물이 되었고, 어떤 계층에는 장롱 속 케케묵은 장물이 되었으며, 현대인에겐 애물이 되었으니.



영국인들의 조끼 문화

그렇다면 왜 지금도 이들은 여전히 조끼를 입을까?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느 나라나 영국의 조끼와 비슷한, 양 소매가 생략된 형태의 의복은 존재했다. 조끼의 어원이 된 남유럽의 재크(jaque), 프랑스의 질레(gilet), 인도의 반얀(banyan) 등이 그것이다. 한복에도 저고리 위에 덧입는 배자는 좌우 소매가 없는 덧옷이다. 문화권마다 대표적인 조끼는 존재해왔지만, 영국인들만큼 아직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이들은 드물다고 생각된다. 본드 스트리트와 저민 스트리트의 여러 남성복 가게 쇼윈도에는 꼭 맞는 조끼를 입고 서 있는 마네킹이 즐비하다. 사냥 같은 교외 활동에 필요한 클래식 레저 웨어를 파는 곳에는 헌팅 질레와 피셔맨 베스트가, 포멀 웨어를 파는 곳에는 실크로 만든 팬시한 디너 베스트가 준비되어 있다. 영국인은 복장에 민감한 민족이다. 영국 사회에서 셔츠 차림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다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남성 셔츠는 일종의 속옷에서 발전된 것이어서 몸통을 제외한 목과 소매 장식만 발달해왔다. 즉 셔츠 차림만으로 몸통을 드러내는 것은 내의를 내보이는 결례인 셈이니 재킷이나 조끼로 가려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이야 비교적 개방적인 복장 문화가 정착되어 셔츠 차림이 일반화되었다고는 하나, 이 옷차림을 보일 수밖에 없을 땐 먼저 실례를 표현하고 양해를 구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조끼는 당당히 재킷을 벗을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조끼를 여전히 애호하는 영국인들을 혹자는 허례허식의 민족이라 평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들의 역사적 관습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찰스 2세는 1660년대에 세 번의 큰 국난을 겪는데 흑사병으로 알려진 런던 대역병과 런던 대화재, 그리고 의회의 지원을 받지 못해 빈약한 재정 상태로 치른 네덜란드와의 전쟁이다. 그는 국내의 절박한 자금난과 어수선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복장 개혁을 단행했다. 프랑스 망명 중 헝가리인과 터키인이 즐겨 입던 조끼를 눈여겨보고 그것을 수입했고, 웨이스트 코트라 불렀다. 1666년 10월에는 궁의 공식 복장으로
도입해 거추장스럽고 화려한 이전의 복식을 청산하고 조끼를 포함한 스리피스를 정착시켰다. 이때부터 영국인들에게 조끼 착용은 일종의 은밀한 개성 표현 수단이었으며 습관적 행동이 되었다. 마치 낮이 되면 습관적으로 찻잎을 우려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재킷에 받쳐 입는 옷으로 조끼 대신 카디건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체 구속에 불편을 느껴 헐렁한 옷을 찾는 노인 같기도 하고, 오래된 유니폼을 입은 취향 없는 남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조끼를 제대로 갖춰 입으면 확실히 남성미가 대두되는 것 같다. 옷을 만드는 입장에서 조끼는 신체에 꼭 맞게 재단하는 옷으로, 비스포크의 가봉 과정에도 재킷이나 바지보다 좀 더 세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옷을 여몄을 때 가슴 부분이 들뜨지 않도록 하면서 아랫배를 완벽히 커버하고, 요추에서 정확히 끝나 둔부의 미감을 확실히 돋보이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조끼는 남성미를 자연스레 드러내 다른 액세서리의 효과를 배가하기도 한다. 조끼 여밈으로 넥타이 매듭을 풍성하고 단단해 보이도록 하는 것이 타이 핀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멋스럽다. 게다가 예전엔 조끼가 회중시계를 수납하는 역할을 하면서 단춧구멍 사이 체인 홀로 삐져나온 도금된 시곗줄로 재력을 드러내기도 했다(이제는 회중시계를 사용하지 않지만 여전히 새빌 로의 비스포크 하우스에서 만드는 웨이스트 코트에는 시곗줄을 위한 체인 홀을 만들기도 한다).



옷을 입는 것은 체면을 덧입는 것이다. 중요한 자리에서 입는 포멀 웨어는 그런 이유로 엄격한 드레스 코드가 정해져 있다. 아침과 저녁 예장의 최고봉인 모닝 수트와 테일 코트 차림은 베스트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로열 애스콧이나 버킹엄 궁의 아침 행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모닝코트 차림에서 조끼는 누런 오리알 색과 옅은 회색을 기본으로 하지만, 때론 핑크와 하늘색 같은 파스텔 톤으로 산뜻한 룩을 연출하기도 한다. 저녁에는 연미복 특유의 여밈 없는 재킷 안에 입는 흰색 조끼가 반드시 필요하다. 내 기억 속 조끼를 잘 입는 남자를 꼽으라면 1968년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의 스티브 맥퀸이 떠오른다. 대다수 사람들이 조끼를 포함한 스리피스를 잘 갖추어 입은 영국 남자로 제임스 본드를 떠올리겠지만, 그런 스타일은 조금 식상하다. 이제는 너무 전형적이라고나 할까. 오히려 트위드 재킷에 점퍼 차림으로 액션 신을 연기하는 터프 가이 맥퀸이 극 중 조끼를 갖춘 착장을 선보였을 때 야생마에 안장을 씌운 듯 야성과 이성이 교묘히 결합된 신선미가 느껴졌다. 홑여밈의 싱글브레스트지만 끝부분이 각지지 않고 더블브레스트처럼 허리선을 따라 일직선을 이루는 디자인이라 더욱 특별했다.
인간이 옷을 걸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과 내부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전자는 실용, 후자는 치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고, 조끼는 그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에 충실한 의복 중 하나다. 조끼를 사랑하는 영국인들의 개인적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내부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조끼를 입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영국인들은 오늘도 그렇게 조끼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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