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여행에서 발견한 ‘강릉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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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 2024

글 김수진(프리랜스 에디터 & 디블렌트 CD)| 사진 고성연, 솔올미술관 제공

예술, 건축, 자연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면서도 평온한 도시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로컬의 미학’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련된 고민이 깊어지는 시점에서, 바다 내음 가득한 강릉의 미적 정체성을 새롭게 영글어가도록 해줄 만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동안 현대미술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강릉에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같은 예술 축제가 열리고,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이 제주, 여수에 이어 세 번째로 문을 열었으며, 잠재력 있는 국내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 등장하거나 타지 작가가 작업실을 꾸리는 등 전반적인 풍경이 달라진 요즘이다(2021년부터 정부의 문화도시로 선정돼 다양한 문화 지원 사업이 이뤄지고 있기도 하다). 사실 강릉은 도시 전체에 문화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허난설헌과 허균,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부터 고즈넉한 천 년 고찰, 아름다운 정원 선교장까지 ‘강원도의 힘’을 실감할 수 있는 도시 아닌가. 지난해 2회째 열린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의 주제도 1913년 강릉 김씨 여성의 시각을 담은 <서유록>. 옛 명성과 현대 문화를 잘 조합해 세계화하는 일이 요즘 ‘로컬라이징’의 숙제인데, 지금 변화하는 강릉의 모습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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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을 상징하는 소나무 언덕에 들어선 ‘솔올미술관’이 요즘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다. 건축계 노벨상으로 통하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리처드 마이어가 세운 ‘마이어 파트너스’에서 설계를 맡아 초기부터 화제를 모았던 이 미술관은 시내 풍경을 멋진 파노라마 뷰로 담을 수 있는 위치에서 정갈한 자태를 뽐낸다. 마이어 파트너스의 연덕호 대표는 개관 기자 간담회 때 “전시 작품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건축물 자체가 완벽히 조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하학적 형태가 투명해 보이도록 백색 콘크리트와 알루미늄을 사용하고 유리 통창을 활용해 외부 조경을 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게 한 미술관 건물은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조형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건축이 다가 아니다. 명품 미술관 하나가 한 도시뿐만 아니라 국가의 자존심을 세운다는 생각으로 3년여에 걸쳐 개관을 준비했다는 이 미술관은 인상적인 기획전으로도 시선을 끌었다. 현대미술계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의 거장 루치오 폰타나를 한국 미술관 최초로 소개하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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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타나로 시작을 알린 솔올미술관에 거는 기대와 우려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의 기획과 루치오 폰타나 재단의 협력으로 이뤄진 <루치오 폰타나: 공간·기다림>. 이 전시에 선보인 폰타나의 작품으로는 1940년대 후반 ‘공간주의 선언’ 발표 이후 본격화한 공간주의를 대표하는 ‘베기(Tagli)’ 연작, 캔버스에 구멍을 뚫은 ‘뚫기(Buchi)’ 연작 등을 비롯해 ‘공간 환경’ 연작 6점이 포함된다. 빛과 공간으로 확장된 폰타나의 공간 환경 속으로 직접 들어가볼 수도 있는데, 그가 1964년 발표한 ‘백색선언’에서 강조한 “우리는 예술의 진화를 이어가고자 한다”라는 말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이라는 공간을 잊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마치 우리 스스로가 작가의 캔버스 위에 놓인 듯한 느낌이랄까. 한국 미술과 세계 미술을 연결하겠다는 비전 아래 솔올미술관이 선택한 한국 작가는 곽인식이다. 전이 폰타나 전시와 더불어 오는 4월 14일까지 열린다. 시대를 공유했지만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다른 두 작가의 전시 호흡이 흥미롭다. 독일에서 미술사를 오래 공부해 해외 인적 네트워크가 풍부한 김석모 솔올미술관 관장은 해외 작가만 소개하는 게 아니라 한국 작가와의 다이얼로그를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고. “지금 한국은 기술적으로 굉장히 진보했잖아요. 그만큼 미술도 현학적인 기술에 빠져 있어요. 하지만 결국 미술은 우리 마음을 움직여야 하죠. 그런 점에서 기술과 예술을 융합해 선구적으로 작업한 사람이 폰타나라고 생각했고, 원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곽인식 작가의 예술성도 폰타나와 미학적인 다이얼로그와 연결됩니다.” 그는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미술은 열려 있어야 합니다. 미술가들은 틀에서 도망가고 미술사학자들은 틀 안에 넣으려고 하죠. 거기에서 애매모호한 위치가 미술관입니다. 솔올미술관이 진정으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미술관을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오는 5월부터 열릴 다음 전시도 눈길을 끈다. 미국 추상 표현주의 작가 아그네스 마틴의 개인전과 정상화 작가 전시가 예정돼 있는데, 런던의 대표적인 미술관 테이트 모던 전 관장인 프랜시스 모리스가 큐레이터를 맡았다고. 그런데 현시점에서는 약간의 우려를 보내는 시선도 있다. 그동안 위탁받았던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의 임무가 오는 8월 종료돼 두 번째 전시를 마치면 강릉시가 미술관 운영을 맡게 되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밝힌 청사진이 없다. 한국과 세계를 잇는 취지의 좋은 구성을 이어나갈 수 있는 든든한 지원과 더불어 한 갤러리의 소속 작가들만 조명받는 일이 없는 균형도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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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 한가운데의 현대미술 공간, 대추무파인아트
대추무파인아트의 설희경 대표는 여러 우려에도 아그네스 마틴 같은 대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솔올미술관이 생겼다는 점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대추무파인아트는 영국에서 파인 아트를 공부한 김래현, 그리고 서울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설희경이 공동 대표로 운영하는 강릉의 현대미술 전시 공간이다. ‘예술 나눔 리더’라는 비전으로 강릉 주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현대미술 전시를 선보이는 대추무파인아트는 건물 외관이나 내부 공간은 무척 모던한데,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전망은 ‘논밭’이라는 점이 힐링 포인트다(게다가 바로 옆에는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고택 ‘임경당’이 자리한다). 다양한 작가를 발굴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젊은 작가 공모전인 ‘대추무 오픈콜’도 진행하는데,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지난해 ‘내일의 작가상’에 선정된 작가 고사리의 작업을 볼 수 있었다. 1층에서 마주친, 짧은 연극 무대 같은 고사리 작가의 작품은 대추무파인아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공간에 길게 드리운 얇고 긴 비닐을 헤치고 작품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에서 비닐이 사그락대며 부딪히는 소리가 아름답게 울리지만, 계속 비닐이 시야를 가려 어딘가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드는 몽환적인 공감각적 작업이다. 2024 ‘대추무 오픈콜’도 3월 말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현재는 고향인 강원도를 떠났다가 돌아온 작가,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작가, 강원도로 이주한 작가 등이 바다, 바람, 눈 등 강원도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심하게 다뤄졌던 오래된 공간이 예술 공간으로 조금씩 바뀌는 사례도 눈에 띈다. 좀 더 로컬리티를 담고 표현하는 예술가는 없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은 지난해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프랜시스 알리스의 작품 ‘모래 위의 선(SANDLINES)’을 상영했고, 대관령 ‘치유의 숲’을 동선으로 활용해 베를린에서 주로 활동하는 티노 세갈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노암터널, 옥천동 웨어하우스, 동부시장 레인보우 전시장은 공간 자체를 전시한 느낌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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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공간부터 로컬 크리에이터까지
서울 생활에 지친 작가나 강릉을 연고로 작업하는 작가의 미적 감각을 드러내 보이는 공간도 생기고 있다. 물론 시작 단계지만 기대를 걸 만한 잠재력은 있어 보인다. 크리에이터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갤러리 ‘버징가’를 운영하는 김지수 작가(배철 작가와 공동 운영)는 오랜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강릉으로 내려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그녀 역시 강릉에서 나고 자라, 몸으로 담은 세상 이야기 ‘몸의 기록’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요즘 강릉은 여러 혼란스러운 면이 교차하는 것 같아요.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오랜 고장의 역사성과 2017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생긴 KTX로 전국에서 외지인과 많은 관광객이 유입되면서 여러 충돌이 일어나기도 해요. 커피 한 톨 나지 않는 강릉이 커피 문화를 선도하는 지방이 되기도, 이탈리아 셰프들의 유입으로 이탈리아 음식의 성지로 거듭나기도 하며 그야말로 전 세계인들이 몰려오고 있죠. 요즘 많은 문화 지원 사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정작 저희 같은 창작자에게 체감되는 문화적 자극은 작아 보입니다.”(대추무파인아트와 버징가의 기획으로 전시했던 <시골영감> 도록 중). 아직은 작업실에서 미래를 모색하는 일이 더 많지만, 버징가의 올해 스케줄은 빡빡하다. 전시 <용강동에서 살아남기>와 <운명적 데이터>를 진행할 예정이고 아트 숍도 오픈할 계획이다. 예술과 문화의 최전선에서 활약해온 뮤지션 박현준(대중음악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로 H2O, 삐삐밴드, 삐삐롱스타킹, 3호선 버터플라이 등에서 활동)과 20년간 잡지 에디터였던 김정민 부부가 교동에 오픈한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자 카페 ‘레어’에서도 곧 작가들과 함께 공연이나 전시를 기획할 예정이다. 서울을 떠나 소도시에 살고 싶은 로망이 있던 두 사람은 지난해 가을 강릉에 들렀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있는 교동의 분위기에 반해버렸고, 그날로 강릉 이주를 결심했다고. 이들은 강릉문화재단 사업인 ‘작당모의’를 통해 이주민의 새로운 시선으로 발견한 강릉의 자연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메시지를 음악과 요리로 선보이기도 했다. “레어가 있는 길이 예전의 신사동 가로수길 같았거든요. 크리에이터들이 막 움트기 시작한 그때의 열정 같은 게 느껴졌어요. 이주민의 시각으로 레어가 지역사회의 예술 문화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과 다양한 연대를 하고 싶어요.” 고요한 옛 골목길에 열정적인 크리에이터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지역의 젊은 작가들이 갤러리를 꾸리고, 한편에서는 세계적인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 막 생겨난 곳, 지금 강릉의 모습이다. 예술 신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강릉이 과연 이런 변화를 잘 이어가 지역사회의 좋은 사례로 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크고 작은 움직임이 모여 나비효과처럼 커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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