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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3, 2020

글 김종훈(자동차 칼럼니스트)

최근 5년 동안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스포츠카 브랜드와 럭셔리 카 브랜드에서 선보인 새로운 모델들. SUV부터 GT까지, 일상성을 확보한 모델은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브랜드 정체성 운운하던 걱정은 기우였다. 변화의 바람은 더 많은 사람에게 브랜드를 경험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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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포르쉐에서 시작됐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2년의 일이었다. 포르쉐가 SUV를 선보였다. 지금이야 익숙한 일이지만, 그땐 신선했다. 아니, 충격적이었다. 몇몇은 포르쉐가 브랜드 가치를 돈과 바꾼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부침이었다.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을 깨야 하는 법이니까. 포르쉐의 첫 SUV인 카이엔은 그 벽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사람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쉐가 만들면 SUV든 스포츠카든, 그건 포르쉐였다. 그 점이 중요했다. 브랜드 가치는 고수할 때만 빛나는 게 아니었다. 도전과 변화 속에서도 반짝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외관이 좀 어색하긴 했지만, 스포츠카 브랜드의 SUV에 매력을 느꼈다. 타기 편한 포르쉐, 공간 효율 좋은 포르쉐, 조금 다른 포르쉐. SUV라는 장르가 포르쉐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연결 고리가 됐다. 포르쉐에 카이엔은 역전 만루 홈런이었다. 포르쉐는 분위기를 쇄신할 계기가 필요했다. 수익률을 개선할 필요도 있었다. 카이엔은 둘 다 만족시켰다. 사람들에게 포르쉐를 선택하도록 하면서, 쪼들리는 포르쉐 재정을 두둑하게 바꿔놓았다. 카이엔이 성공하자 포르쉐는 도전을 이어나갔다. 포르쉐에는 세단 격인 4도어 쿠페와 카이엔보다 작은 SUV인 마칸을 선보였다. 둘 다 성공했다. 지갑이 두둑해지면서 전통적인 포르쉐 라인업도 탄탄해졌다. 선순환 구조였다. 포르쉐의 변화는 자동차업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브랜드를 자극했다. 기존에 SUV가 없던 브랜드가 가능성을 엿봤다. 스포츠카와 럭셔리 카 만드는 브랜드가 너나 할 것 없이 SUV를 발표했다. SUV 전성시대라는 흐름과도 맞닿았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해, 전통을 가치로 내세우던 브랜드가 전에 없던 모델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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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V에 정체성을 담아
2010년대 중반, 자동차 기사의 단골 주제는 이랬다. 스포츠카 & 럭셔리 카 브랜드의 SUV는 어떤 모습일까. 걱정보다는 기대가 많았다. 포르쉐의 성공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여전히 마뜩잖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소수였다. 대체로 새로운 모델, 게다가 각 브랜드 성격을 어떻게 SUV라는 장르에 녹였을지 기대했다. 포르쉐 카이엔은 SUV지만 포르쉐였으니까. 다른 브랜드 역시 허투루 만들지 않을 테니까.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니라 본질이었다. 게다가 SUV에 대한 시각도 예전과 달라졌다. 좁고 거친 길을 탐험하듯 달리는 자동차라는 표현은 특정 모델만의 수사였다. 대부분 도심형을 지향했다. 사람들은 SUV를 더 넓은 공간과 더 트인 시야, 더 우람한 차체를 품은 자동차로 여겼다. 새로운 패밀리 카로서 SUV가 떠오른 셈이다. 그러니까 SUV는 새로운 차종으로 가능성이 무한했다. 군침 도는 장르가 된 것이다. SUV가 없던 스포츠카 & 럭셔리 카 브랜드가 저마다 하나씩 발표할 정도로. 포르쉐와 경쟁하던 브랜드가 먼저 SUV를 완성했다. 재규어는 F-페이스, 마세라티는 르반떼를 선보였다. 2016년의 일이었다. 재규어가 빨리 내놓을 줄 알았다. 그룹 내에 랜드로버라는 걸출한 SUV 전문 브랜드가 있으니까. 랜드로버의 사륜구동 기술력에 재규어만의 디자인과 정체성을 심었다. F-페이스를 보면 누구라도 재규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재규어는 F-페이스를 한국에서 출시할 때 트랙에서 시승 행사를 열었다. 오프로드 코스도 있었지만, 트랙 시승이 먼저였다. SUV지만 재규어의 레이싱 DNA를 이식했다는 뜻이다. 차명에도 F가 들어갔다. 재규어가 선보인 스포츠카 F-타입의 연장선이었다. F-페이스의 실내 역시 F-타입에서 적용한 요소를 대입했다. 트랙에서 몰아붙인 F-페이스는 SUV다우면서 달리기 실력도 준수했다. 이후 고성능 모델인 F-페이스 SVR을 내놓으며 재규어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마세라티 르반떼는 GT 브랜드다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GT, 즉 그랜드 투어링은 장거리를 빠르고 편안하게 달리는 고성능 쿠페를 뜻한다. 마세라티는 문이 2개든, 4개든 GT다운 성능과 감성을 뽐내왔다. 르반떼 역시 그 연장선에서 완성했다.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유려한 선이 차체를 감쌌다. 덕분에 SUV인데도 둔해 보이지 않았다. 포세이돈의 삼지창 엠블럼은 여전히 라디에이터 그릴에 박혀 마세라티임을 강조했다. 실내는 질 좋은 가죽을 두툼하게 둘러 마세라티 특유의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무엇보다 ‘소리’가 여전했다. 마세라티는 배기음이 황홀하기로 유명하다.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실내에 스며들어오는 웅장한 배기음이 가장 큰 매력이다. 르반떼 역시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여전히 웅장하고 풍성했다. 르반떼가 SUV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공간 활용도 높은 마세라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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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거나 짜릿하거나
걱정은 역시 기우였다. 재규어 F-페이스와 마세라티 르반떼가 증명했다. SUV라고 해서 브랜드 정체성이 희석되지 않았다. 오히려 SUV라는 장르에 브랜드 정체성을 어떻게 녹이는지 보는 재미가 생겼다. 브랜드 나름대로 SUV를 해석한 결과물이었으니까. 게다가 이후 등장할 SUV는 슈퍼 스포츠카 브랜드와 럭셔리 카 브랜드가 선보일 모델이었다. 전통과 고집으로 따지면 다른 브랜드가 넘볼 수 없었다. 그에 합당한 가격 또한. 브랜드 가치를 올곧게 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게 뻔했다. 기대하는 그 이상을 기다렸다.
벤틀리는 벤테이가를 선보이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와 함께 럭셔리 카의 양대 기둥으로 존재해왔다. 성능은 물론, 브랜드 전통에 걸맞은 고급스러운 안팎이 핵심이다. 벤테이가는 원래 벤틀리에 SUV가 있던 것처럼, 처음 봤을 때부터 벤틀리 일원처럼 보였다. 럭셔리 카 브랜드의 모델들은 모두 크고 웅장하다. 어떤 모델이든 비슷한 감흥을 선사한다. 벤테이가 역시, 아니 SUV이기에 더욱 농도 짙은 감흥을 자아냈다. 높아진 전고는 벤테이가를 더욱 웅장하게 강조했다. 매끈한 펜더 굴곡은 근육질처럼 강인해 보이면서 고유한 기품도 연출했다. 실내는 장인의 수작업으로 완성한 각종 요소로 가득했다. SUV인 만큼 공간이 커졌으니 각 요소는 한층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최신 모델이 전통적인 벤틀리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까 자동차 태동기, 마차처럼 생긴 초기 자동차가 떠올랐다. 그때도 전고가 높아 공간은 크고, 귀족들의 취향을 고려해 화려했다. 벤테이가가 그랬다. 롤스로이스는 아예 클래식 롤스로이스 형태를 소환했다. 롤스로이스 컬리넌은 SUV치고는 낮고, 기존 모델치고는 높았다. SUV를 롤스로이스식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SUV라기보다는 크로스오버로 보이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롤스로이스 고유한 가치를 지니면서 공간을 늘리는 데 집중했다. 역시 전고가 높아졌기에 보다 웅장했다. 판테온 신전을 닮은 롤스로이스 라디에이터 그릴은 더욱 당당하게 자태를 뽐냈다. 원래 롤스로이스는 각을 살려 위압적인 기품을 웅변한다. 컬리넌은 커진 차체를 바탕으로 고유한 느낌을 더욱 강조했다. SUV라서 정체성이 희석되는 거 아니냐는 몇 년 전 걱정이 무색했다. SUV라는 장르는 오히려 럭셔리 카 브랜드에는 더욱 정체성을 증폭하는 장이 되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럭셔리 카 브랜드가 성공적으로 SUV를 내놓으며 관심이 람보르기니 우루스에 쏠렸다. 람보르기니 우루스는 벤테이가와 컬리넌과는 관점이 또 달랐다. 스포츠카, 아니 슈퍼 스포츠카 브랜드인 람보르기니의 SUV인 까닭이다. 고성능의 극단을 지향하는 브랜드가 빚은 SUV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람보르기니는 우루스로 고성능과 편의성의 황금 비율을 찾았다. 상반되는 두 성질을 절묘하게 조합했다. 브랜드의 저변을 넓힐 관문으로 설정한 셈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접한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말했다. 람보르기니답게 짜릿하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운전하기 편하다고. 판매율은 자연스레 증가했다. 2019년 전 세계에서 5천여 대 팔렸다. 람보르기니 역사상 최고 실적이었다. 국내에서도 올해 2월까지 총 1백28대가 판매됐다. 올라운드 슈퍼 스포츠카로서 우루스는 새로운 고객층을 끌어들였다.
애스턴마틴도 DBX를 선보이며 SUV를 라인업에 포함시켰다. 기존 모델과 디자인 연속성을 유지하며 SUV다운 활용성을 강조했다. 스포츠카 브랜드답게 짜릿한 성능도 놓치지 않았다. 이제 고성능 SUV는 익숙한 단어다. 이상한 조합이 아니다. SUV라는 형태의 물리적 한계 역시 기술로 극복해왔다. 순수한 스포츠카와 비교하면 우위를 점하진 못하지만, SUV로서도 짜릿한 주행 감각을 자랑한다. 대신 스포츠카보다 활용도가 월등히 높다. 약간 덜어내고 많은 걸 채웠다. 고객 입장에선 반길 수밖에 없는 상품이다. 스포츠카 브랜드가 내놓은 SUV의 공통적인 방향성이다. 어떻게 보면 SUV라는 장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는 판매율이 증명한다. 포르쉐의 역전 만루 홈런까지는 아니어도 각각 긍정적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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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V는 아니더라도
SUV를 만들지 않은 스포츠카 & 럭셔리 카 브랜드는 아직 있다. 그중에서 맥라렌은 SUV 대신 GT라는 장르를 선보였다. 순수한 스포츠카를 지향하는 맥라렌으로선 이 정도도 큰 결심이랄까. 장거리 여행이 상징하는 일상성을 확보한 스포츠카다. 원래 GT의 용도도 그랬으니까. 맥라렌 GT는 트렁크 공간을 절묘하게 만들었다. 위로 높진 않지만 앞뒤로 길어 이모저모 담을 수 있다. 자체적으로 골프 캐디 백과 보스턴 백, 가먼트 백도 만들었다. 차체 일체감과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물론 가격은 수천만원대로 높다. 하지만 맥라렌 GT를 고려하는 사람에겐 전용 제품으로서 가치가 더 높다. 맥라렌 GT는 솜털 쫑긋 솟는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편하게 운전할 유연성도 획득했다. 전고를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만큼 높일 수 있으니 슈퍼 스포츠카라서 불편한 점을 덜어냈다. 서스펜션도 의외로 유연해 좀 조인 세단으로 느껴질 정도다. 맥라렌으로선 편의성에 신경 쓴 대목이다. SUV 대신 보다 일상성을 높인 모델이다.
페라리는 새로운 GT인 로마를 선보였다. 페라리도 SUV를 만들겠다고 발표하긴 했다. 내년에 등장할 페라리 첫 SUV인 프로산게다. 그보다 먼저 새로운 GT인 로마로보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겨냥했다. 프로산게는 로마를 기반으로 만들었다. 즉 로마에서부터 페라리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우선 기존 페라리의 다소 과격한 디자인과 다르다. 매끈한 곡선과 간결한 선이 돋보인다. 슈퍼 스포츠카의 독특함보다는 매력적인 GT로 자리매김한다. 누구나 탐낼 만한 외관으로 저변을 넓힌 것이다. 실내 역시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적극 활용했다. 새로운 모델로 페라리의 영역을 확대했다. 부드러워진 페라리에 사람들은 반응했다. 주문량이 밀려 오래 기다려야 한다. 페라리의 변화 역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스포츠카 & 럭셔리 카 브랜드의 변화는 5년 남짓 되는 기간에 일어났다. SUV를 내놓거나 GT를 선보이거나. 두 장르 모두 방향성은 같다. 브랜드 가치를 새로운 그릇에 담으려는 시도다. SUV의 인기가 기폭제가 되어 일상성을 확보한 자동차를 선보였다. 이런 변화는 스포츠카 & 럭셔리 카 브랜드의 영역을 확장했다. 더 크고 좋은, 혹은 새로운 걸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한 셈이다. 결국 브랜드는 움직여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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