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예술가들, ‘상생’을 향한 사회적 실천 모델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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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6, 2022

글 김정연(독립 기획자)

도쿠멘타15(documenta fifteen) in Kassel
올봄 3년 만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Biennale Arte 2022)를 시작으로 지난 달에는 베를린 비엔날레와 아트 바젤,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가 차례로 막을 올렸다. 이 중 도쿠멘타는 5년에 한 번씩 1백 일에 걸쳐 독일 중부의 한적한 소도시 카셀에서 열리는 현대미술계 최고 권위의 행사. 하지만 최초의 아시아 출신 예술감독, 그것도 개인이나 듀오가 아닌 컬렉티브(공동체)의 등용을 처음 시도한 올해의 도쿠멘타는 개막 직전에는 관심을 덜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같은 서유럽 내에서 벌어지는 ‘스타’로 점철된 진용, 블록버스터 콘텐츠를 내세운 ‘이웃 도시’들의 화려함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화제성이 덜했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외려 참신하고 진취적이라는 반응이 많이 나온다.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둔 이번 도쿠멘타의 특성상 평가는 이르지만 1백 일의 여정만이 아니라 그 이후를 더 궁금하게 만드는 새로운 ‘판’이 카셀에서 펼쳐지고 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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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했던 전 세계적 휴지기의 과거와 다시금 국경 간 자유로운 왕래를 예측하는 근미래가 만난 현재, 세계 문화 예술계의 시선이 유럽을 향하고 있다. 특히 올해로 15회를 맞이한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는 지난 2019년 2월 도쿠멘타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기반의, 그것도 단일이나 공동 큐레이터가 아닌 자카르타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아트 컬렉티브 ‘루앙루파(ruangrupa)’를 예술감독으로 선정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당시 루앙루파는 성명을 통해 “1955년 도쿠멘타가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 창설되었다면, 2022년의 도쿠멘타15는 식민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적 구조에서 비롯된 현재의 상처에 주목하고, 이를 다양한 세계관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동반자적 관계 기반의 모델에 대조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도쿠멘타15가 진행되는 1백 일 이후에도 유효할, 협력 관계의 유기적 공동체와 문화 예술 플랫폼의 구축. 루앙루파의 이러한 제안은 카셀이라는 도시와 도쿠멘타가 지닌 역사적 의의, 명성, 그리고 전시의 맥락을 넘어선 공동의 사회적 실천에 가깝다. 게다가 이론만 그럴듯한 공허한 모토가 아니라 그들이 실천해온 개념과 활동에 바탕을 둔 것이라 진정성이 엿보인다. 지난 6월 15일 카셀의 주 경기장(Auestadion)에서 열린 개막식에서는 참여 작가의 퍼포먼스에 이어 뮤직비디오 형식의 영상 기록이 상영되었다. 관객과 함께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호응을 이끌어낸 루앙루파의 결에 맞춘 듯 도쿠멘타 전시장 곳곳에는 느슨하고 편안하게 공감하고 사색할 수 있는 관람 환경이 꾸려져, 실천적 공동체라는 그들의 세계관을 차근차근 이해해나가는 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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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컬렉티브 루앙루파의 실천적 개념 ‘룸붕’, 그리고 에코시스템
‘공간 형태(spatial form)’, 혹은 ‘예술 공간(art space)’을 뜻하는 루앙루파는 2000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결성된 비영리 아트 컬렉티브다. 도쿠멘타15의 예술감독을 맡은 10명의 핵심 멤버를 포함한 컬렉티브는 지난 20여 년간 우정과 연대, 공동체의 중요성을 근간으로 예술가는 물론 지역 공동체, 다학제 간의 교류와 협동을 실행해왔다. 집단성을 중요시하며 사회적, 공간적, 개인적 실천을 주도해온 이들의 행보는 도쿠멘타15를 특정 주제로 묶는 대신 ‘룸붕(lumbung)’이라는 실행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잘 설명된다. 인도네시아어로 룸붕은 수확을 마친 뒤 공동체를 위해 잉여 수확물을 저장해두는 ‘공동의 곡창’을 의미하는데, 루앙루파는 룸붕이 유머와 관대함, 독립성, 투명성, 풍요로움과 재생의 가치를 기반으로 공동체, 공유 자원의 구축과 공평한 분배의 대안 경제를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 카셀을 하나의 도시 유기체로 바라보며, 2013년께부터 자카르타 기반의 컬렉티브들과 시도해온 ‘에코시스템(ekosistem)’을 도입하는데, 이는 생물과 환경, 다양한 종이 상호작용하는 생태계를 참조한 것으로 지식이나 견해, 프로그램 등을 공유하고 연결하는 협업 네트워크 구조를 말한다. 준비 기간 동안 루앙루파와 5명의 아티스틱 팀, 14팀의 룸붕 멤버, 그리고 53명의 룸붕 아티스트는 수평적 협업 관계를 유지하며, 수많은 소규모 모임(마젤리스, majelis)을 통해 개별적, 집단적, 나아가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적 접근 방식을 모색했다. 탈중앙화를 시도하며 다수의 미술관이 위치한 도시 중심부 미테(Mitte), 풀다강(Fulda River) 주변부, 동부 산업 지구인 베텐하우젠(Bettenhausen), 그리고 북부 노르트슈타트(Nordstadt)에 펼쳐진 32곳의 전시 장소는 작가와 관객, 지역민의 상호작용을 활성화하는 룸붕의 실행 장소로, 전시 기간 동안, 그리고 이후에도 기능과 역할이 순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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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분배된 장소와 기능, 다양한 언어로 펼쳐지는 룸붕
카셀 중심부의 루루하우스(ruruHaus)는 물리적 공간에 모여 의견과 자원을 나누고, 협력할 수 있는 도시의 공유 거실이다. 실제 루앙루파는 자카르타에서 임대주택의 거실을 전시와 협력의 공공장소로 바꾸었는데, 이러한 접근 방식을 도입한 루루하우스는 만남과 휴식, 교류의 장이 된다. 도쿠멘타의 상징적 장소 중 하나로 꼽히는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은 확장된 개념의 배움터로 변신했다.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루루키즈(Rurukids), 브라질 작가 그라지엘라 쿤쉬가 마련한 공공 돌봄 센터, 공용 도서관, 거주 공간과 주방, 아시아 지역 퍼포먼스 예술과 네덜란드 노예 해방의 역사에 관한 아카이빙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의 전시를 위한 공간 등으로 꾸려졌다. 삶과 예술의 병치, 소통과 협력, 공유를 아우르는 룸붕 자체로 거듭난 느낌이었다. 오토노임(Ottoneum)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한국의 시각 연구 밴드 이끼바위쿠르르의 영상과 설치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제주도와 미크로네시아, 인도네시아에 남은 태평양전쟁의 흔적을 추적한 ‘열대 이야기’와 제주 해녀 공동체에 관한 ‘해초 이야기’는 장소와 공동체의 현재가 드러내는 식민의 역사와 생태학의 다각적 관계성에 주목한다. 지근거리의 도쿠멘타 할레(documenta Halle)는 1992년 온전히 도쿠멘타를 위해 지은 공간으로, 와주쿠 아트 프로젝트는 전면 유리로 이루어진 입구에 나이로비 빈민가와 마사이 전통 가옥을 참고한 구조물을 설치해 접근 가능한 재료와 문화적 태도에 기인한 장소의 경험을 전복시킨다. 전시장 내부에는 반누르그 컬래버레이티브 아츠 앤드 컬처의 그림자 인형극,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케이트보드장은 물론이고 작가와 컬렉티브들이 출판물을 만들거나 제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룸붕 프레스가 자리한다. 우간다의 타란티노라 불리는 나브와나 IGG(와칼리가 우간다)가 제작한 <풋볼 코만도>가 프리미어 상영되며 이들 스타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공개 워크숍이 마련된다.
헤센주립박물관(Hessisches Landesmuseum)에는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피나 외그렌지의 단채널 영상 ‘눈사태(Avalanche, 2022)’가 눈길을 은근히, 그러면서도 강하게 잡아끈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터키 남부의 국경 산악 지대인 무쿠스의 쿠르드인들이 겪은 국가적, 종교적 탄압, 그리고 자연재해로 인한 과거의 죽음과 현재의 위태로움을 눈 덮인 풍경, 아카이브 사진과 오버랩하는 이 작업은 시적인 영상미와 호소력 있는 내러티브로 상당수 관람객들로 하여금 1시간의 러닝 타임 내내 자리를 못 뜨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입구에 드리운 티슈 설치물은 현지 여인들이 손바느질한 것으로, 떠난 이들에 대한 기억과 애도를 담고 있다. 베텐하우젠 지역의 할렌바트 오스트(Hallenbad Ost)는 1929년 바우하우스 양식으로 지은 실내 수영장으로 2009년 이후 빈 공간이었다. 도쿠멘타15는 인도네시아 컬렉티브 타링 파디의 대형 배너와 포스터, 등신대 크기의 카드보드지 인형으로 도시의 구성원들이 기억하는 이 공간의 경험을 재정의한다. 2021년 독일의 제조사 휘브너가 도쿠멘타15에 일부 양도한 산업 부지의 휘브너 에어리얼(Hu··bner areal)에서는 전시와 협업, 콘서트, 연극 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작가들이 만든 상품을 판매하는 룸붕 키오스크가 운영된다. 이 밖에도 풀다 강변과 도심 공원 카를스우에, 지하도로 등 카셀 곳곳에 지속 가능한 유무형의 가치, 물질/비물질의 재료, 공간, 문화적 다양성이나 갈등에 대한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 오프닝 기간의 룸붕 프로그램과 더불어 광장이나 공원처럼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공장소를 뜻하는 메이단(Meydan) 프로그램은 워크숍, 토크, 퍼포먼스, 스크리닝, 그리고 다양한 모임의 형태로 매달 둘째 주 주말(금요일부터 일요일)에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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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 1백 일 이후의 열린 가능성
도쿠멘타15에 참여한 작가들은 개별, 혹은 집단의 언어로 함께 룸붕을 연습하고 실천한다. 토론과 모임을 통한 이들의 상호작용은 녹음이나 녹화, 글쓰기로 ‘수확(harvest)’되어 자원으로 공유될 예정이다. 룸붕 라디오와 룸붕 필름을 통해 이미 수확된 자원과 앞으로의 기간 동안 모일 수확물은 도쿠멘타15의 1백 일 대장정이 끝난 뒤에도 산발적으로 또 다른 문맥을 형성하고, 증가시킬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집단적 실천의 여정에는 나이와 성별, 신체적 장애나 문화적 배경의 장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전시 소책자보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버전을 택할 수 있고, 각각의 전시 장소에 접근 가능한 시설을 명시한 것처럼 모두가 초대되고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공식 오픈 뒤 얼마 되지 않아 타링 파디의 대형 야외 배너 ‘민중의 정의’가 반유대적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작가와 도쿠멘타 측이 수하르토 독재 정권기의 복잡한 권력 관계가 유발한 폭력과 착취, 검열에 희생된 인도네시아인들의 오랜 투쟁을 담은 작업임을 분명히 밝히고 유감을 표했음에도 배너는 설치 3일 만에 철거되었다. 루앙루파가 제안하는 생태학적인 동시에 인류학적인 룸붕의 가치가 문화적 배경을 빌미로 폄훼되거나 배타적 태도로 오독되지 않기를, 평등한 실천과 연대로 도쿠멘타 이후에도 풍요롭게 작동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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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 ’22 Summer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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