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uthentic Mo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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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고성연

현대미술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럭셔리 브랜드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때로는 배후에 가려진 예술의 원동력이라는 소리 없는 찬사를 듣기도 한다. 소수이기는 해도 명품 브랜드들이 문화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이유는 아마도, 한계에 부딪칠지언정, 예술처럼 ‘영속성’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는 애써 화젯거리를 만들어내려 하기보다는 진지하게 예술에 대한 고유한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는, 다분히 진정성이 느껴지는 브랜드도 있다. 현대미술 후원에서 남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에르메네질도 제냐가 은근히 눈길을 끄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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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펼치는 문화 예술 지원 활동을 가리키는 ‘메세나(Mecenat)’라는 단어의 기원은 고대 로마제국으로 올라간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집권하던 시절, 정치가이자 외교관, 시인이었던 가이우스 마이케나스(Gaius Maecenas)를 프랑스어로 발음한 단어가 그 유래다. ‘국부(國父)’라는 영예로운 칭호까지 얻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로마를 시민 정치와 예술의 중심지로 키운 인물이다. 3년 여 전, 이 찬란한 도시에 세운 이탈리아 최초의 공공 현대미술관인 로마 국립현대미술관(MAXXI)에서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담은 시각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프로젝트명은 인간의 몸을 활용한 조각 작품과 관객을 두지 않은 비디오 퍼포먼스로 엮은 ‘로마 이야기(Fabulae Romanae)’.

과거의 영광과 현대의 영감이 교차하는 로마를 무대로 삼다
로마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동시에 끊임없이 변하는 유동적인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도시의 구조를 재해석하고자 했다는 이 프로젝트는 유목적인 형태의 거주지를 뜻하는 ‘텐트’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옷인 동시에 이동 가능한 거주지를 연상케 하는, 그래서 건축과 의복의 기능이 물리적, 사회적, 상징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refuge wear’가 나온다. 또 기하학적 형태의 오브제와 천을 걸친 남녀가 등장해 ‘입을 수 있는 조각’을 시연한다. 그리고 마치 로마의 숨결을 되살리는 듯한 시인 마리오 페트루치의 시구를 덧입힌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것을 올려보낸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절박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것들
마치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에서 숨죽이며
황제의 손가락 신호를 기다리듯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정지된 순간


이 의미심장한 설치 작품은 MAXXI에 영구 소장된 ‘3차원(Tridimensionale)’의 일부로,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위한 사회적 참여와 윤리, 미학을 연계하는 독창적인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루시 + 호르헤 오르타(Lucy + Jorge Orta) 듀오가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후원으로 진행한 장기 프로젝트였다. “로마의 새로운 궤적을 그리는 은유적 지도로, 고대의 아름다움과 현대의 모습을 새롭게 이어주는 네트워크가 된다”라는 설명을 들으면 언뜻 난해하게도 느껴지지만 ‘사유할 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이런 면모야말로 현대미술의 오묘한 매력이기도 하다. 패션과 예술, 건축, 문학을 접목한 이 프로젝트에는 무엇보다 ‘아름다움과 선함, 편안함이 교차한다’는 표현에 수긍할 만한 뭔지 모를 경건함이 묻어난다. 제냐라는 브랜드가 ‘제냐트(ZegnArt)’라는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미술에서 모색하는 가치가 엿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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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를 달군 또 다른 이야기 ‘Fabulae Naturae’

자연과 환경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현대미술로 풀어내는 통찰은 올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도시 밀라노에서도 발현됐다. ‘로마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라틴어로 자연 이야기라는 뜻을 지닌 ‘Fabulae Naturae’라는 프로젝트였다. ‘음식’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자연과 미술, 음악을 아우른 이 프로젝트는 지난 5월 초 건물 벽과 창을 온통 꽃 패턴으로 장식해 그 자체로 ‘예술’이 된 본사 사옥에서 1차 향연을 펼쳤다. 이 행사는 올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의 대장정을 펼친 밀라노 엑스포의 주요 테마인 ‘아트와 푸드(arts & foods)’에 맞춘 행보이기도 했지만 화려한 눈요기보다는 지구 생태계를 둘러싼 창의성에 유달리 공을 들여온 제냐 재단(Fondazione Zegna)의 초점과도 부합해 더욱 빛을 발했다.
이번에도 루시 + 호르헤 오르타 듀오, 그리고 ‘로마 이야기’를 진두지휘한 큐레이터 마리아 루이자의 협업이 돋보였다. 1997년 이래 의식적인 만찬을 차려 예술, 영양, 윤리를 주제를 표현해온 오르타 듀오는 야생동물을 소재로 한 행위 예술을 선보였다. 묘한 감성의 플루트 연주곡을 배경으로 벌레를 연상케 하는 펠트 소재의 가면과 수트를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퍼포먼스였다. 알고 보니 제냐가 밀라노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트리베로에 조성한 생태 공원 오사이 제냐(Oasi Zegna)에서 희귀종 딱정벌레 카라부스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들은 또 섬세한 드로잉과 색감이 눈길을 잡아끄는 꽃무늬 도자기 접시 컬렉션 ‘로열 리모주(Royal Limoges)’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금은 이탈리아의 명소 친퀘테레를 보존하는 데 쓰인다. 제냐의 텍스타일 아카이브인 ‘허버라인 펀드(Heberlein Fund)’를 모티브로 삼은 한정판 컬렉션이다. 이날 행사에는 밀라노 출신의 친환경적인 스타 셰프인 다비데 올다니가 식재료를 중시하는 그만의 요리 철학을 발휘해 리소토를 대접하는 푸드 퍼포먼스도 곁들였다. 그야말로 무대미술과 음악, 미술, 요리가 미묘한 시너지를 발하는 융합의 장이었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행위는 사람들을 한데 뭉치게 하는 힘이 있어요. 1990년대 중?후반 EU 시대가 열리면서 이에 반대하는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음식을 던지면서 시위를 할 때 저희는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움을 느꼈어요. 그래서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깨끗하게 씻은 다음 부페식 만찬을 차렸고, 사람들을 초대했죠.” 오르타 듀오가 다이닝 의식을 매개체로 음식을 둘러싼 윤리 의식과 커뮤니티의 역할을 보여주는 ‘70X7 The Meal’이라는 의식을 계속 펼쳐온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라틴어로 ‘커멘살리티(commensality)’라 통하는, ‘식사를 함께 만들어 먹는 행위’가 연대 의식과 협동심을 강화한다는 논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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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에 뿌리를 둔 아트 사랑이 지극했던 제냐 가문의 전통

제냐 재단과 오르타 듀오의 조우에는 가히 ‘필연적’이라고 할 만한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 제냐가 창업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이었던 트리베로 인근에 50만 여 그루의 침엽수와 진달래 나무를 심으면서 ‘재생 마을’을 일군 데다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생태 공원 오아시 제냐까지 조성하면서 환경 보존에 힘을 쏟아왔듯이, 이 다국적 듀오(루시는 영국, 호르헤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역시 프랑스에서 낙후된 공장 부지를 예술 마을로 바꾸고 더불어 사는 문화유산 재생 프로그램을 꾸려오고 있다. 이처럼 자연과 예술을 통합시키는 ‘그린 마인드(green mind)’는 어째서 제냐 재단을 이끄는 수장인 안나 제냐가 이 듀오를 아끼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사실 문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럭셔리 브랜드들은 가끔 그 화려함으로 화젯거리가 된다. 쟁쟁한 스타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대중에게 선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대중성도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예술과 삶의 소박한 통합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연과 전통을 지키고 꽃피우기 위한 끈기 있는 후원을 펼쳐온 제냐 재단처럼 진정성 있는 메세나 활동은 흔히 볼 수 없기에 큰 울림을 준다. 특히 어렵다는 이유로, 마냥 고상하고 화려하지 않다는 이유로 쉽게 지나치기 쉽지만 시대 의식을 뿜어내는 현대미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작가들과의 협업이기에 더욱 큰 함의를 품는 것 같다.
지난가을까지 제냐 가문의 고향 트리베로에서 열린 <Flower Landscapes> 역시 그처럼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진정성의 미학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제냐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인 ‘카사 제냐’에 펼쳐진 이 전시는 로마 이야기의 일부 작품부터 유달리 자연을 사랑했던 창업자의 마음을 반영한 듯한 풍경 사진과 2천2백여 개의 풍부한 허버라인 아카이브 등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트리베로의 미려한 경치와 호흡을 하면서 담백하지만 정감 있는 분위기를 내뿜었다. 특히 비틀스의 여덟 번째 정규 앨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허츠 클럽 밴드(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재킷 디자인 등 반세기 이전에 유행하던 문화를 보여주는 각종 식물과 꽃무늬 원단이 잔잔한 감흥을 자아냈다. 자연과 예술이 일상에서 어우러지는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애에 뿌리를 둔 DNA가 느껴져서였다. “예술 작품은 거대한 수수께끼와 같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답이다.” 오르타 듀오가 평생의 롤모델로 삼았다는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는 이런 말을 남겼다. 자연과 전통, 그리고 일상을 버텨내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의 창을 열어놓는 제냐 재단의 꾸준한 행보에서 현대미술을 향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유를 대변해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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