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otte Perriand as an Archit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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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2, 2020

글 고성연

The Women Who Inspire Us_11 Part II


‘신여성’이라는 용어가 있다. 3년 전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신여성 도착하다>라는 전시도 열렸는데, 당시의 도록을 인용하자면 신여성은 1890년대 영국의 ‘New Woman’ 열풍에서 출발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 새로운 여성성의 아이콘이다. 근대적 지식과 문물, 이념을 받아들이고 실천한 여성에 다름 아니다. 20세기 초 태어나 모더니즘의 미학을 전파한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의 삶을 반추해보면 영락없는 신여성의 면모가 느껴진다.
하지만 유리 장벽에 둘러싸인 채 억울함을 호소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당차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던 그녀는 디자인이든 건축이든 자신이 놓인 환경 속에서 재능을 쌓고 펼치는 데 바빠 ‘제약’ 따위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건축계에서 20세기의 그녀는 어떻게 창조적 행보를 펼쳤을까? 지난 호의 디자이너 여정에 이어 경탄스럽기도 아쉽기도 한 건축가로서의 자취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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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차원에서 신비로운 인물을 뮤즈로 삼는 일은 그다지 새로운 마케팅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난봄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Ae-sop)에서 향수를 새로 선보이면서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을 내세웠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절로 귀가 쫑긋해졌다. 그녀의 긴 커리어 여정을 돌아보는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의 대대적인 회고전을 위한 프리뷰 행사를 작년 봄 밀라노에서 참석했던 인연도 있거니와 페리앙에게 영감을 받아 향수를 만든 프랑스인 조향사를 몇 차례 만난 적도 있던 터라 자연스레 관심이 치솟았다. 의아하기도 했다. 아무리 ‘여성’이 문화 예술 생태계의 ‘핫한’ 키워드라고 해도 1세기도 더 전에 태어난, 전설의 여배우도 아닌 샤를로트 페리앙(1903~1999)을 어째서 뮤즈로 삼았을까. 게다가 흔히 하는 방식처럼 그녀의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패키지 디자인’을 내놓기보다 굳이 ‘향’ 자체에 초점을 맞췄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이솝은 역시 스토리텔링을 제대로 꿰뚫고 있었고, 조향사인 바나베 피용도 진정성을 담아 작업에 임한 듯했다. 페리앙은 평생에 걸쳐 자연을 누비면서 야외 활동을 즐겼는데, 피용은 그녀의 이름을 딴 일본 장미와 그녀와 함께 작업한 목수들의 작업장, 알프스산맥의 상쾌함 등을 아우르며 그 정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냈다. 이 향수를 수식하는 ‘강렬한 부드러움’은 창조적 주체로서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그렇지만 조화롭게 살았던 페리앙의 행보와 닮은 구석이 있다. 모더니즘 거장이었던 르 코르뷔지에의 협력자로 디자인계에서 ‘LC 시리즈’로 일컬어지는 명품 가구를 남겼지만 페리앙은 사실 인간과 자연의 통합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삶의 예술’을 꿈꾸던, 주거와 공간, 건축을 둘러싼 큰 그림을 그리던 인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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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의 혁신, 근대성을 담은 공간을 그리다

대담하고 에너지 충만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류애 넘치는 샤를로트 페리앙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산에 올라 벗은 구두를 쥔 양손을 하늘을 향해 뻗은 나체의 상반신. 등이 훤히 드러나는 구도인 터라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총기 어린 눈으로 포효하는 젊은 그녀의 환희가 절로 느껴진다. 당시 르 코르뷔지에와 그의 사촌 피에르 잔느레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페리앙의 자신감도 엿보인다. 여성, 그것도 신예가 가구와 공간 디자인을 넘나들며 활약한다는 건 아주 드문 경우였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 기회는 스스로 창출한 것이었다. 1927년 파리의 전람회 살롱 도톤(Salon d’Autonme)에서 선보인 페리앙의 부엌 ‘지붕 아래의 바(Le Bar Sous le Toit)’가 처음에 퇴짜를 놓았던 르 코르뷔지에의 마음을 돌려놓았는데, 니켈로 도금한 바 등 금속 재료를 활용하고 수납을 살리며 기하학적 구조를 띠면서도 마치 도시의 은신처를 연상시키는 ‘공간’은 그만큼 싹수가 남달랐다. 그 뒤로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와 10년간 3인방으로 함께하면서 ‘LC 시리즈’로 내놓은 협업물이든 나중에 그녀만의 독자적인 아카이브로 끄집어낸 것이든 그녀의 가구 디자인은 대부분 이탈리아 가구 회사 카시나(Cassina)에서 제작하고 있으므로 이제 쉽게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공간 디자인이나 건축은 쉽게 접할 수 없지만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로서 그녀의 빼어난 역량이 점점 더 재조명되면서 자료 사진이나 각종 전시를 통해 접할 수는 있다.
작년 가을부터 지난 2월 말까지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린 페리앙의 회고전은 모더니즘의 지평을 확장하고 일상의 혁신을 지향했던 ‘설계자’로서 그녀의 면면을 제대로 체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중에는 1929년 살롱 도톤에 3인방으로 출품한 ‘주거를 위한 설비’가 자주 언급되는데, 벽 대신 반듯한 수납용 캐비닛이 채우고 있고, 다이닝 룸과 거실을 겸한 공간이 있으며, 욕실마저 주거 공간으로 편입시키면서 공간의 단절을 없앤 시도로 당시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설비’라는 용어 자체도 장식적인 인테리어와 건축을 구별하던 관습을 타파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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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의 회귀, 인간을 향한 애정을 담다

샤를로트 페리앙이 이처럼 20대 시절 잇따라 선보인 주거 공간 디자인은 모더니즘이 각광받던 그 시절 ‘여성’과 ‘건축’에 얽힌 고정관념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건축 사학자 메리 맥레오드(Mary McLeod)는 당시 페리앙이 전람회에 내놓은 주거 디자인을 보면 ‘과학적 설계’와 ‘기능주의’가 그저 남성의 전유물 같은 관심사가 아니라 가사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여성의 비전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스스로를 위한 공간이었던 생-쉴피스(Saint-Sulpice) 스튜디오나 ‘워크 & 스포츠’라는 프로젝트 기획안을 보더라도 크롬 소재의 튜브 가구라든지 편리한 ‘개방형’ 동선 등 근대적인 아파트에 대한 그녀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자동차계와 영화계에서 영감을 받고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곱씹은 페리앙은 20세기에 여성 인권 신장을 주장하던 페미니즘 세력은 아니었지만 모더니즘을 이끈 흔치 않은 여성 기수로서 활발한 행보를 펼치며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했던 셈이다.
페리앙은 1930년에 접어들면서 차가운 기능주의에 천착한 듯한 경향으로 흘러버린 모던 디자인을 넘어 자연미가 깃든, 보다 인간 중심적인 디자인에 애정을 쏟았다. 1934년에 구상해 <오늘의 건축>이라는 잡지에서 수상한 ‘물가 위의 집(La Maison au Bord de l’Eau)’이 그 같은 관심이 반영된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꼽힌다. 지나치게 현대적(modern)이라는 이유로 스케치로만 남은 미완의 작품이었지만 페리앙 재단과 루이 비통, 카시나 등의 다각적 협업으로 7년 전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처음 선보였고,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회고전에도 등장해 화제가 됐다. 노동자 가정을 위해 지었다는 조립식 건축물은 내부에 통나무로 만든 가구가 아기자기하게 자리하고 있다. 또 동시대의 가구와 예술품이 어우러진 ‘젊은이를 위한 집(Maison du Jeune, 1935)’이라든지 로켓처럼 생긴 유목 건축물 ‘레퓌주 토노(Refuge Tonneau, 1938)’ 등도 자연으로의 회귀를 담고 있다. 그 정점을 보여주는 건축물은 레자크(Les Arcs) 스키 리조트다. 산비탈과 결을 같이하듯 누워 있는 이 건축물은 자연과 산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녹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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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맥의 허브, 예술과 삶의 통합을 추구하다

르 코르뷔지에 스튜디오에서 나와 독자 노선을 걸은 1937년 이후 페리앙의 다채로운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극동 아시아에 체류하면서 장인 정신이 깃든 공예에서 신선한 영감을 얻었는데, ‘선택-전통-창조’라는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훗날 유네스코를 위해 만든 ‘메종 드 테(Maison de The′, 1993)’는 자연과 동양 문화에 대한 그녀의 지식과 애정이 담긴 작품으로 ‘장소와 문화의 대화’를 꾀하는 사색의 공간으로 호평받았다. 페리앙은 지구촌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적 지평을 넓히면서도 인맥의 끈도 놓지 않았다. 특유의 활달하고도 자신감 어린 성격은 성별이나 위계를 떠나 주위의 동력을 뭉치게 하는 자석 같은 힘을 발휘했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지부를 찍으며 ‘재건’ 열풍에 휩싸인 프랑스에 돌아와서는 페르낭 레제, 파블로 피카소, 알렉산더 칼더 등 당대의 예술가 친구들을 한데 모아 프로젝트를 꾸리기도 했다. 당시(1947년) <엘르> 매거진은 그녀를 상상 속 여성 정부의 ‘재건부 장관’이라 칭했다고.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회고전 도록 제목처럼 페리앙은 매 순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간(inventing a new world)’ 게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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