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in Style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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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 2017

김현경(큐레이터)

Grand Weavers
경계, 그 사이를 잇다


prologue
● 서구적 사유 체계에서 ‘진리’란 현실 너머 형이상학적 차원에 있다. 삶 건너편에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다. 반면 동양적 사고에서 ‘진리’란 곧 ‘도(道)’의 개념이다. ‘길’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일상 한가운데에서 겪는 실천적 경험의 차원이다.


●● 이 같은 상반된 의식 구조처럼, 동서양의 미학적 태도 역시 대조적이다. 특히 서구 추상미술이 구상과 추상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 아래 강박적으로 ‘사물(자연) 너머의 본질을 발견한다’는 방향을 띤다면, 우리의 추상미술은 ‘사물(자연)의 본질을 발견한다’는 것에 가깝다. 이는 자연(自然)을 대상의 외형에 내재된 질서인 동시에 그 자체를 하나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이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이해하는 동양의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 최근 세계 미술 시장에서 아시아 추상미술이 주목받고 있는 현상은 추상화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가 증가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서구식 추상의 ‘대안’이자 ‘확장’으로 여겨질 만큼의 사유와 어휘를 갖춘 데 따른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행위의 반복성을 통한 신체와 물질의 만남, 거기에 동양의 자기 수행과 정신성이 어우러진 한국적 추상미술은 서구의 시각 중심적 사고에 기반한 추상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굳이 단색화의 틀에 갇힐 필요 없이 말이다.


이번 지면 전시에서 소개하는 작가 5인-이강소, 이배, 최병소, 하종현, 오수환-은 비움과 채움, 소멸과 생성, 인위(人爲)와 무위(無爲), 물질과 행위 등 상반된 요소를 결합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알고 있는 장인적 예술가들이다. 마치 베틀 위에서 북을 위아래로 옮기는, 반복적이지만 숙련된 작업을 통해 하나의 아름다운 천이 탄생하듯, 오랜 시간에 걸쳐 깃든 작가 고유의 질서가 만들어낸 화면을 바라보며 한국적 추상의 미학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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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Lee Kang-So
텅 빈 충만
“단지 물고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았으나 이 중에 또한 파도가 있네.” 중국 현대 산수화가 리커란(李可染, 1907~1989)의 말처럼 동양화에서 여백은 서로 다른 자연물 사이의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며, 기실 물이거나 구름이거나 안개 등 또 다른 사물의 공간이다. 이는 그림에 그려진 산과 강물, 숲의 존재를 더욱 부각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러한 여백은 관람자로 하여금 각자 생각하는 공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유로운 공간의 이동을 유도한다. 따라서 여백은 결핍으로서의 빈자리가 아니라 채워진 빈자리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림 안과 밖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강소(1943년생)의 작품명, ‘허(Emptiness)’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허(虛)가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는 ‘텅 빈 충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선(線)은 오리들의 조용한 유영(遊泳)을 닮은 ‘을(乙)’의 희미한 흔적과 대비를 이루며, 여백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사실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오리와 사슴, 배 등으로 인식되는 여러 모티브는 관람자로 하여금 개개의 감각적 경험을 일깨워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단초에 불과하다. 더불어 짙은 어두움, 혹은 그윽한 안개가 깔린 듯한 화면의 여백은 서구 추상 표현주의자와 같은 개인의 열정이나 주관의 표현이 아니라, 작품에서 거리를 두고 상상하게끔 유도하는 유동적 공간이다. 마치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기듯, 이강소의 여백은 생명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운(氣韻)의 현현(顯現)이자, 열린 가능성의 공간으로서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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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 Lee Bae
박제된 시간, 물질과 기억의 초상
검은 안료를 가득 머금은 붓으로 툭툭 찍어 내린 듯한 점과 선은 미색 배경과 대비되면서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준다. 그리다 만 듯한 미완의 검은 형태는 허공을 빠르게 훑고 지나간 붓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한다. 특히 농담의 변화 없이 검은색으로 팽팽하게 가득 차 있는 필선은 블랙홀 같은 위용을 발산하는데, 이에 이끌려 작품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본다. 그 순간 거침없이 휘두르는 일필휘지의 순간이 급속 냉동된 듯 육화(肉化)된 검은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이배(1956년생)는 정서적 유대감을 지닌 숯이라는 재료를 통해 동양화적 기법과 느낌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작가는 숯가루 섞은 검은 물감으로 형태를 그린 후 일정한 두께의 투명 아크릴 미디엄(medium)으로 화면을 덮고, 다시 검은 세필로 그 위에 겹쳐 그리는 과정을 반복해 은은한 미색의 마티에르를 구현한다. 이때 화면에 반복된 여러 겹의 층위 사이로 빛이 들어가면, 화선지가 먹을 머금었을 때와 같은 깊이감과 번짐 효과가 드러난다. 이는 밀랍에 신체적 제스처와 그 행위의 시간성을 가둠으로써 현재의 시간에서 분리된 영원한 기억을 위한 기념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우주의 거대함을 떠올리고, 박제된 나비에서 자유의 날갯짓을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배의 작품을 바라보며, 굵고 검은 획을 따라 흐르는 선적인 율동감과 그 위에 퍼지는 짙은 묵향과 같은, 현실의 물질적 흔적을 뛰어넘는 추상적인 인상을 함께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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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Choi Byung-So
소멸과 생성의 전이적 공간
우리의 삶은 태어나서 생명을 얻는 순간 이후로는 점차 모든 것을 잃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는 남겨진 자들의 가슴속에 깊고 검은 상처를 낸다. 산고의 고통처럼 축복은 상처와 고난과 함께 찾아온다. 최병소(1943년생)는 지난 40여 년간 화면 위에 선을 그으면서 텍스트 지우기를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소멸과 생성, 물질과 행위, 현실과 초월 사이의 충돌과 긴장의 흔적, 전이를 현재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타버린 재처럼 표면이 부서질 듯 군데군데 찢겨진 그의 작품은 수천 혹은 수만 번의 연필과 볼펜의 선 긋기로 뒤덮인 신문지에 다름 아니다. 종이가 얇아지다 못해 찢어질 때까지 진행된 반복적인 행위는 종국에는 선의 흔적을 감추고, 마치 연소된 나무껍질이나 금속성 광물질에 가까운 듯 보이는 독창적인 표면을 새롭게 탄생시킨다. 사실 신문지 작업의 출발은 1970년대의 억압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의 언론 탄압과 신문 검열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읽을 수 없는 신문, 내용을 알 수 없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하루에 거의 10시간씩, 40여 년간 지속되고 있는 선 긋기와 지우기 작업은 작가가 처음에 의도한 의미나 가치를 점점 비워내고, 물아일체의 자기 수양 차원에 이르렀다. 최병소 작업의 정체성은 자신의 몸에 각인된 자연의 질서, 즉 소멸과 생성의 순환을 극도의 인내와 긴 시간의 노동 행위를 통해 발현하는 데 있다. 마치 수억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물과 바람이 한시도 쉬지 않고 반복적인 풍화작용을 통해 장엄한 천연 조각물을 지상에 만들어놓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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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현 Ha Chong-Hyun
물성(物性), 물질과 행위의 변이
20세기 미국 추상미술계의 우상이었던 작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자신의 회화 작품을 설명하면서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의 전부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말을 했다. 이는 회화가 캔버스 표면에 제시된 형태와 색채의 물리적 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작가 행위의 흔적과 주관적 감정, 생각의 잔재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화면 위 형태 배치와 구성, 물감의 색상은 매 순간의 선택과 결정에 의한 것이므로. 하종현(1935년생)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우리는 거칠고 성긴 올로 짜인 마대의 천 틈새로 물감이 올올이 배어나오며 형성된 독특한 마티에르를 보게 된다. 이는 걸쭉하게 갠 물감을 마대 천 뒤에서 밀어 넣음으로써 물감으로 가득 찬 캔버스 앞면에 최소한의 행위(붓질)를 통해 완성된 것이다. 그의 ‘접합(接合)’ 시리즈는 단순한 질료적 접합이 아니다. 물감을 마대 뒷면에서 앞면으로 흘려보내고, 다시 앞쪽에 스며 나온 물감을 마대에 누르는 신체적 행위를 통해 물성(物性)의 발현을 이끄는 물질(물감)과 신체적 행위의 접합이다. 그 흔적은 어떤 사물의 모습도 연상시키지 않지만, 그렇기에 외려 물질의 소박한 자연적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대개 암버(umber) 계열의 황색과 오커(ocher) 계열의 청색, 그리고 중간색인 화이트를 택하는 하종현의 작품은 마치 지각변동 이전의 지구 색깔을 떠오르게 하며, 캔버스 위에서 물성이 현현하는 과정은 지진으로 분출된 지하의 암석이 깨져 흙이 되는 지구의 형성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또 인간적 스케일에서 보면 도예가의 손과 흙의 관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신체적 행위와 물질, 물성의 발현은 먼 과거에서 이어진 원형적 결합이자, 인간과 물질의 근원적 관계에 대한 기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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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환 Oh Su-Fan
무위(無爲)의 풍경
바람과 물, 하늘과 대지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어느 한순간의 모습을 놓고 ‘완성’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하늘은 높아지고 산과 들은 울긋불긋해지듯, 자연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해간다. 대자연의 변함없는 순환적 질서 속에서 변화무쌍함은 그 자체로 미완(未完)이지만, 생(生)을 향한 기운(氣運)으로서 완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에서 느끼는 미적 감흥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남겨진 형상이나 양식만이 아니라 예술가의 창조 과정, 일련의 경험 또한 예술이다. 20세기 미학자 요제프 간트너(Joseph Gantner, 1896~1988)는 “예술의 본질은 ‘완성된 것’, 즉 ‘형상(figuration)’이 아니라 ‘미완성적인 것’, 즉 ‘선-형상(pre-figuration)’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언어 이전, 또는 그림 자체 이전의 상태’를 추구하는 오수환 작가(1946년생)는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몸이 가는 대로 붓의 흔적을 화폭에 담는다. 그의 획(劃)은 캔버스 위에서 힘 있게 솟구치며 위로 뻗어가다가도 갑자기 사선을 그리며 아래로 곤두박질하고, 완만한 흐름으로 물결을 타듯 떠다니다가, 바람에 흩날리듯 어지럽게 흩어진다. 때로는 물감이 흘러내리기도 하고 번지기도 하는 등 그리기 작업의 자연스러운 흔적이 캔버스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에 시작과 끝이 없고 거기에 어떠한 의도가 내포돼 있지 않듯이 오수환의 무너지고 흐트러진 선의 흔적은 미완이자 비언어적인 몸의 기억, 우연한 에너지의 흐름이다. 수십 장의 스케치와 드로잉 작업을 통해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표현의 욕망과 대상에 대한 집착을 비워내는, 수행에 가까운 그의 작업은 지난 40여 년간 매일같이 계속되어왔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은 무언가를 그리면서도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는 무위의 풍경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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