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AC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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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여미영(디자인 스튜디오 D3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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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가을밤,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 강 주위에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는데도 예술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1900년, 첨단 기술력을 예술화한 기마르 양식(Style Guimard)의 궁전 그랑 팔레(Grand Palais)의 유리 돔은 오후 9시까지 화려한 빛을 뿜는다. 웬만한 미술관과 페어는 6~7시면 문을 닫는 것이 유럽의 상례지만 FIAC 현장은 불야성을 이룬다.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트에 대한 파리지앵의 남다른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폐관할 시간이라며 초조하게 방문객을 출구로 모는 직원들이 나타날 때까지도 이 궁전의 화려한 43m 유리 돔 아래에는 한 작품이라도 더 감상하거나 구매하려는 단정한 매무새의 관람객 무리로 분주했다.
위축된 경기에 아랑곳없이 아트 마켓은 고공 행진

지난 10월 22일부터 4일간 열린 42회 FIAC. 작년보다 참가 갤러리 수를 21개나 줄여 22개국에서 1백70개의 갤러리만 참여시키고 질을 높인 이 행사의 감독 제니퍼 플레이(Jannifer Flay)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유럽의 경기 침체는 철저히 예술계를 비켜가고 있다. 올해 경기 상승세를 타는 미국발 훈풍으로 아메리칸 컬렉터들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는 후문도 들렸다. 대중에 개방하기에 앞서 이뤄진 컬렉터와 VIP 방문이 끝나자마자 예사롭지 않은 판매 조짐을 보였다고 관계자들이 입을 모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행사 직후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의 보도에 따르면 컬렉터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 신중히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판매는 예년에 비해 상승세였다. 거장부터 신진 작가, 사진과 회화에서 조각까지 성격이 다양한 작품이 골고루 판매됐으며, 매진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갤러리도 있었다.
화제에 오른 인물에는 발로 그림을 그렸다는 일본의 아방가르드 화가 가주오 시라가(Kazuo Shiraga)가 포함돼 있었다. 7년 전 고인이 되기 전까지는 세계 미술계에서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던 그의 작품 뤼센(Ryusen, 1991)과 가쿠에키(Kakueki, 1985)가 각각 약 4백만달러와 2백50만달러에 판매돼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늘 내가 소신껏 구입한 무명의 작품이 몇 년 뒤에는 세계 컬렉터들이 소장 목록에 넣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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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하지만 예술에는 유독 관대한 파리지앵

그래도 궁전은 궁전이다. 그랑 팔레라는 장소에는 분명히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다. 파블로 피카소, 애니시 커푸어, 데이비드 호크니. 미술관에서도 좀처럼 실물로 보기 힘든 거장들의 작품이 몇 걸음 걷기 무섭게 나타난다. 가격을 책정하기 힘든 고가의 작품 앞엔 누가 만질세라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콧대 높기로 유명한 파리지앵은 예술에만은 예외적으로 관대하다. 높은 예술 안목으로 따를 자가 없는 그들이라지만, 일단 마음에 들면 주저 없이 열렬히 밀어주는 것 역시 이길 자가 없다는 말도 있다. 거장의 작품을 소장한 유명 갤러리들의 리스트에도 틈틈이 중견과 신진 작가들의 신작이 빠짐없이 오르는 이유다.
수년 전부터는 대중화에 더 힘쓰는 모습이다. 다소 도도한 아트 페어로 인식되는 FIAC의 운영위조차 이러한 시류에 동참코자 2년 전부터 라 시테(La Cite′ de la Mode et du Design)에 신진 갤러리 위주의 위성 아트 페어, 오피시엘(Officielle)을 개최하고 있다. FIAC에 참여하지 못한 다양한 예술계 인사들은 장외 위성 전시를 확산시켰다. 작은 갤러리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아트 페어 YIA도 올해 5회를 맞이했다. FIAC에 비해 부담 없는 가격의 중진·신진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을 찾을 수 있고, 다수의 작품 옆에 친절히 가격까지 쓰여 있어 일반인들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쇼핑하듯 취향에 맞는 소장품을 구매할 수 있는 친근함이 있다.
하지만 굳이 비싼 관람료를 부담하며 전시장을 찾지 않아도, 파리지앵은 평범한 일상 속에 걸어 들어온 예술을 반갑게 맞을 수 있는 특권을 갖는다. 특히 정원 사랑이 유별난 파리지앵의 산책 장소 튀일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과 파리 식물원(Jardin des Plantes). FIAC의 배려로 산책로를 거니는 이들 모두에게 최고의 작품들이 공유되는 예술의 보편성이 실현되는 장소다. 거동이 불편해 먼 길 나서기 힘든 노인은 휠체어를 타고, 육아로 분주해 레저는 사치라는 주부도 유모차를 끌고 평소처럼 찾은 일상의 공간에서 예술을 만끽한다. 올해는 예술계 파워 1백 인 중 당당히 아티스트 1위(Art Review 선정)를 한 중국의 아이웨이웨이(Ai Weiwei), 일본의 건축 거장 구마 겐고(Kuma Kengo)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온 아티스트의 작품이 이들을 찾았다.

예술적 감성이 도시 가득 흐르는 파리의 밤

좋은 페어가 흔히 그러하듯, FIAC 기간에도 ‘장외’ 풍경이 더 풍성하고 화려하다. 특히 예술 도시 파리의 진면목은 밤에 발휘된다. FIAC 기간 동안 하루를 지정해 파리 갤러리들이 일제히 야간에 개장을 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연다. 갤러리들의 전당인 생제르맹데프레 지역에서는 갤러리 투어와 밤 문화를 즐기는 아트 피플과 작품을 매개로 허물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랑 팔레 부스에서 이미 방문한 갤러리들도 시내의 갤러리 본점을 찾으면 더욱 과감하고 생동감 넘치는 ‘전시 예술’을 접할 수 있다. 파리의 유명 갤러리 페로탱(Galerie Perrotin)의 경우, 극사실주의 조각가 존 드 안드레아(John De Andrea)의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나체 여성 조각상들 사이로 나체 남성이 퍼포먼스를 병행했다. 무엇이 진짜고 가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조각상인 줄 알고 사람에게 다가가던 관람객들이 깜짝 놀라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 작가의 개인전을 하고 있는 갤러리 리샤르(Galerie Richard). 폐점 시간이 된 줄도 모르고 갤러리의 문을 두드리자 마침 외출하려던 대표가 직접 나와 웃음으로 맞았다. 뒤늦게 알아채고 사과하자 오히려 천천히 둘러보라며 나머지 공간의 불을 모두 켜고 직접 설명해준다. 한국 국적을 밝히자 1990년대부터 최정화 작가와 일을 진행할 정도로 한국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는 그는 프랑스에서 약진해온 한국 작가들의 흥미진진한 활약상을 거침없이 들려줬다. 실험성이 가득한 현대미술관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역시 이 기간 놓쳐서는 안 될 훌륭한 전시 공간 중 하나다. 페어 기간이 아니더라도 밤 12시까지 개방하는 이곳은 언제나 프랑스 예술 감성이 충만한 훌륭한 전시 콘텐츠와 연출이 가득하다. FIAC 기간에는 내년 1월까지 진행되는 화제의 전시,<아이 러브 존 조르노(I♥John Giorno)>가 오픈했다. 미국의 시인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존 조르노를 칭송하며 그의 실험 정신을 다양한 작가들을 통해 해석하는 이 전시는 아트 애호가들 사이에 크게 회자됐다. 큐레이션을 맡은 아티스트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는 롤러스케이트를 탄 스태프들이 관람자 사이를 돌며 조르노의 시가 적힌 색색의 종이를 랜덤으로 건네는 파격적인 연출로 전시 스토리텔링에 생명력을 더했다.
도시 구석구석 펼쳐지는 실험 가득한 전시와 퍼포먼스는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쉽다. 나흘 밤을 새워 다리품을 팔아도 도시엔 볼거리가 넘쳐나고 더욱 새로워진다. 후회 없는 아트 탐험을 기대하는 적극적인 방문객이라면 이곳의 놀라운 전시를 준비한 큐레이터들만큼이나 자신의 동선을 꼼꼼히 큐레이션하는 기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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