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harmony With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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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07, 2019

글 고성연



샴페인은 잘 모른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돔 페리뇽(Dom Pérignon)이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성싶다. 그만큼 브랜드 파워가 강력하다. 하지만 프레스티지 빈티지 샴페인의 대명사인 돔 페리뇽이 자신의 화려한 브랜드 파워에 살짝 눌려 외려 진정한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진성 팬들도 있다. 이 같은 열혈 팬은 물론이고 굳이 샴페인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절로 사랑에 빠질 만한 미각의 향연이 지난 7월 초, 우리의 아름다운 화산섬 제주에서 펼쳐졌다. 미슐랭 스타 셰프 임정식과 손잡고 진행한 ‘돔 페리뇽 빈티지 2002 – 플레니튜드 2’ 행사 현장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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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미가 돋보이는 디자인과 수려한 풍경으로 유명한 제주의 포도 호텔. 온통 녹음으로 뒤덮인 천혜의 자연이 병풍처럼 펼쳐진 이곳의 작은 뜰에 범상치 않은 무대가 마련되었다.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달린, 딱 유리잔 하나만 올려놓을 수 있는 원형 테이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독특한 광경. 마침 비바람이 지나간 뒤라 청신한 공기, 그리고 탁 트인 시야 덕분일까. 심신이 이내 샴페인 잔처럼 투명하게 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윽고 샴페인이 “또르르” 유리잔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새하얀 거품이 몽글몽글 솟는다. 그 맑은 액체를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을 감싸는 유난한 고요함은 혀를 알싸하게 휘감는 미묘한 맛의 미학에 오롯이 집중하게 도와준다. 이날 주인공의 전격 등장에 앞서 진행된 돔 페리뇽 빈티지 2008의 시음.1차 솔로 테이스팅은 이렇듯 일종의 ‘의식’처럼 짧지만 은근히 강렬하게 매듭지어졌다.

녹음 속 선물 같은 ‘신의 물방울’
‘의식’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돔 페리뇽의 시음은 늘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떤 이들은 그저 눈부시게 화려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브랜드의 유전자는 성실하고 숭고한 정신과 이어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돔 페리뇽은 지금으로부터 3백 년도 더 전에 한 수도원에서 창조된 비범한 탄생 스토리를 갖고 있다. 프랑스 상파뉴에 위치한 오빌레 수도원의 수도사이자 재정 담당자 피에르 페리뇽(Pierre Pérignon, 1638~1715)이 우연히 2차 발효되면서 탄산가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팡 터진 와인을 맛본 것을 계기로 탄생한 ‘유레카’의 소산이 아니던가. 실험 정신 충만했던 피에르 페리뇽은 로마시대 이후로 쓸모를 잃은 코르크 마개를 활용해 와인의 숙성도와 신선도를 높였고, 포도알을 압착해 붉은 포도 품종에서 화이트 와인을 얻어내는 특별한 방식을 시도하는 등 꽤 혁신적으로 샴페인에 ‘헌신’했다. 하지만 오늘날 돔 페리뇽이 ‘샴페인의 왕’이니 ‘여왕’이니 하는 칭송을 자주 듣는 이유가 그게 다일 리 없다. 뼈 속 깊이 박힌 도전 정신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여러모로 진화를 거듭했고, 그 결정체 중 하나가 바로 제주도 행사의 백미인 돔 페리뇽 ‘플레니튜드’ 시리즈다. 프랑스어로 ‘절정’이라는 뜻의 ‘플레니튜드(plénitudes)’. 풍부하고도 섬세한 광물 향이 나는 돔 페리뇽 특유의 독창성이 1차, 2차 숙성기를 거치면서 절정에 가까운 경지를 드러냄을 의미하는 수식어다. 예컨대 ‘돔 페리뇽 빈티지 2002 – 플레니튜드 2’라 하면 2차 절정기를 맞이한 돔 페리뇽 빈티지 2002를 뜻한다. 바로 제주 행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조화로운 에너지의 매혹, 그리고 제주의 영감 어린 미식
행사의 꽃을 음미하기 위한 ‘본의식’은 더 특별했다. 우선 ‘돔 페리뇽 빈티지 2002 – 플레니튜드 2’를 위한 2차 솔로 테이스팅이 열렸는데, 장소는 인근에 자리한 미술관. 비움의 미학이 묻어나는 건축물의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위로는 하늘을 향해 뚫린 둥글고 커다란 창이 보이는 공간이다. 포도 호텔을 디자인한 한국계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작품인데, 15년의 숙성기를 거쳐 빛을 본 돔 페리뇽 빈티지 2002 – 플레니튜드 2를 만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잔잔한 물을 바라보면서 한 모금, 둥근 창 너머 보이는 푸른 하늘을 감상하면서 또 한 모금. 에너지의 팽창이 최고조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이한 만큼 풍미가 깊고 강렬하다. 그러면서도 조화로움이 더해져 뭐랄까, 포용력도 느껴진다. 해가 지지 않는 빈티지라 불리는 2002년산의 힘일까? 와인메이커 니콜라스 블램피드레인(Nicholas Blampied-Lane)의 설명을 곁들이자면 이해의 완벽한 날씨 덕에 남다른 성숙도를 품게 됐고, 그것이 조화미로 이어졌다고. 그리고 그 균형 잡힌 풍미를 더 북돋는 환상의 도우미는 더 이상 자연도, 건축도 아니었다. 자리를 옮겨, 포도 호텔의 야외 공간에 차려진 영감 넘치는 만찬. 그것도 제주 식재료를 활용한 미슐랭 2스타 셰프 임정식의 손길을 더한 정찬이라면 궁합의 완성도는 보장된 거나 다름없을 터. 샴페인의 영원한 단짝 캐비아 요리를 시작으로 그릴에 익힌 뒤 김치와 뵈르 블랑 소스로 풍미를 더한 전복 요리, 청량감 돋는 성게밥, 제주 멜젓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소스와 채소를 곁들인 항정살 구이. 플레니튜드 2와 다채롭게 어우러지는 메뉴는 오감의 만족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몸을 감싸면 다시 샴페인에 집중하게 되는 법. 특유의 고요한 정취 속에서 홀짝이다 보니 어느새 밤이 무르익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별이 보이지 않아도 어쩐지 윤동주의 명시 ‘별 헤는 밤’이 떠오르는 제주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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