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ologic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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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 2015

에디터 권유진(스위스 현지 취재)

시계의 수도 제네바를 벗어나 버스로 두어 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스위스의 작은 마을 모티에르. 예로부터 시계 산업의 요람이었던 뇌샤텔 캉통 지역에 자리 잡은 이곳엔 오랜 전통과 시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보베(Bovet) 캐슬, 샤토 드 모티에르(Cha^teau de Mo^tiers)가 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눈앞에 펼쳐진 모티에르 마을의 눈부신 설경은 비로소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스위스에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여유롭고 고요한 분위기, 풍부한 채광으로 워치 매뉴팩처로서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춘 이곳에서, 시계를 예술로 승화하며 워치메이킹의 역사를 일궈나가는 보베의 고귀한 행보에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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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시계 예술의 집약체, 보베
이 세상에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를 뽑는다면 단연 보베다. 시계 마니아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 정도로, 상위 0.01%를 위한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인 보베는 전 세계 유명 시계 컬렉터들이 로망으로 삼는 진귀한 타임피스를 선보인다. 1년에 2천 개 내외만 생산하는 만큼 희소가치가 높은 데다, 가격대 역시 2천만원대부터 억대를 호가하니 누구나 쉽게 범접할 수 있는 시계 브랜드는 결코 아니다. 올해 창립 1백93주년을 맞이한 보베는 1백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상업적인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브랜드 철학과 소신을 꿋꿋이 지키며 시계에 예술적 가치와 생명력을 불어넣은 주인공이다. 19세기 초 창립자 에두아르 보베가 그의 첫 번째 포켓 워치를 만들면서 시작된 역사를 되짚어보면, 스위스 워치메이킹 산업에서 시간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인 ‘시계 예술’을 정착시키고 발전시킨 보베의 노력과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보베라는 브랜드에 대해 논하려면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보베’라 불리며 중국에서는 브랜드명이 시계를 일컫는 일반명사로 쓰일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핸드 인그레이빙 기술과 에나멜 페인팅 데커레이션 덕분이다. 처음으로 투명한 백 케이스로 무브먼트 데커레이션을 볼 수 있도록 고안하고, 20세기 데커레이션 아트가 급격히 쇠퇴하며 에나멜 장인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갈 때 소수의 장인들을 끝까지 보존해온 건 다름아닌 보베였다. 그 때문에 이들의 정교한 미니어처 페인팅 테크닉과 인그레이빙 기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 이로써 보베는 사실적인 묘사와 세밀하게 정제한 미니어처 페인팅으로 중국 황제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시계를 통해 중국 황실이 유럽에서 유래된 예술적 감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지닌 데커레이션 아트는 물론 다이얼, 무브먼트까지 모든 공정을 100% 장인들의 수작업으로만 완성하는 보베의 워치메이킹은 현재 디미에르 1738 공방과 샤토 드 모티에르 워크숍에서 이루어진다. 작은 부품부터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스위스 메이드’ 대신 ‘스위스 핸드크래프트(Swiss Handcrafted)’라 표기한다. 이는 단순한 시계 개념을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보베의 예술성을 더욱 구체화하는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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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메이킹의 자부심, 디미에르 1738
68명의 장인이 근무하는 디미에르 1738 매뉴팩처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아주 작은 시계 부품부터 무브먼트 디자인, 데커레이션, 시계 조립, 퀄리티 컨트롤, A/S 과정까지 모두 장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보베의 무브먼트 공방이다. 샤토 드 모티에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곳은 1738년에 설립해 디미에르 자체 브랜드의 시계를 생산하다가 2006년 보베의 CEO인 파스칼 라피가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보베의 무브먼트를 제작하는 공장으로 자리 잡았다. 시계 다이얼과 브레이슬릿, 핸즈를 제외한 모든 부품을 생산하는데, 하루에 1개의 부품만 작업할 정도로 오랜 시간과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하나의 부품을 만드는 데만 15년 이상 경력의 장인을 투입한다고 하니 그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디미에르의 기술력이 응축된 핵심 부품을 꼽자면 바로 시계 메커니즘의 심장부이자 시간의 정확도를 좌우하는 밸런스 스프링이다. 2006년부터 자체 밸런스 스프링을 제작했는데, 전 세계에서 오직 5개의 매뉴팩처에서만 제작 가능할 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공정이 필요하다. 이는 디미에르 공방의 자부심과 보베 워치의 명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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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의 조화, 샤토 드 모티에르
디미에르 공방에서 시계의 심장인 무브먼트가 태어난다면, 보베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샤토 드 모티에르에서는 시계의 얼굴이 결정된다. 14세기 초에 지어 전통과 역사가 깃든 이 캐슬은 오래된 외관과 아주 현대적이고 모던한 공방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보베의 CEO 파스칼 라피는 2007년에 이곳을 인수해 하이엔드 매뉴팩처를 만들기 위해 레노베이션했는데, 이 유서 깊은 빌딩의 고유한 모습을 지키되 현대적인 매뉴팩처를 조화롭게 접목하는 것이 당시 최대 미션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공방은 아담하지만 아주 평화롭고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었으며, 워치메이커들이 창의적이고 럭셔리한 장인 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다. 온도, 습도, 압력까지 철저하게 조절되는 공방 내부는 시계 장인은 물론 방문자 역시 깨끗하게 소독된 작업복과 신발을 신고 입장해야 할 만큼 작은 먼지 하나도 유입되지 않도록 위생 관리를 엄격하게 한다. 디미에르에서 제작한 무브먼트는 조립된 시계의 형태로 이곳에 도착하는데, 장인이 매의 눈으로 수백 번 체크하고 테스트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소비자에게 유통된다. 보베를 대표하는 인그레이빙 작업과 에나멜 페인팅 역시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핸드 인그레이빙은 무브먼트와 케이스, 다이얼, 베젤, 보에까지 장인의 손길로 섬세하게 새겨진다. 이는 하나를 만드는 데 1백 시간이 소요되고 작은 실수 하나로도 전체 작업을 다시 해야 할 만큼 강도 높은 집중력을 요하는 고도의 기술이다. 이런 특별한 데커레이션 기술을 바탕으로 보베의 특별한 타임피스에 아름다운 얼굴을 부여한다. 보베를 대표하는 아마데오 컬렉션도 마찬가지다. 이는 보베의 첫 시계인 포켓 워치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이며, 손목시계에서 가죽 밴드를 분리하면 탁상시계로, 여기에 체인을 달면 회중시계 혹은 목걸이 펜던트로 사용할 수 있다. 고전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이 매력적인 기술이 바로 보베가 특허를 보유한 아마데오 시스템이다. 이처럼 오랜 전통과 시계가 지닌 현대적 가치를 모두 존중할 수 있었던 것은 파스칼 라의 남다른 브랜드 철학 덕분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러한 브랜드 철학을 설명했다. “오늘날 시간은 모든 곳에 놓여 있습니다. 거리에도, 우리의 컴퓨터와 휴대폰에도. 보베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멸종 위기에 놓인 기술의 영속성을 보존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문화유산인 워치메이킹의 전통과 자부심을 지켜나가는 보베의 고귀한 행보가 앞으로도 더욱 기대된다.

문의 02-2192-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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