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et the contempo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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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 2020

글 고성연 | Photo by SY KO

서울을 물들이고 있는 동시대 예술 감성 三色


흔히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을 가리켜 ‘현대미술’이라고 부르지만 미술계에서 ‘컨템퍼러리(contemporary)’라는 단어는 대개 ‘동시대’로 번역된다. 역사적인 관점과 개념으로 볼 때 ‘동시대 미술’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뒤부터 오늘날까지 진행 중인, 그러니까 ‘전후 현대미술’을 뜻한다. 그만큼 전쟁은 끔찍한 상처를 남겼고, 이후 많은 것이 변화했다. 특히 주범이자 패전국인 독일의 자괴감과 트라우마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고뇌와 갈등은 예술적 에너지를 폭발시킨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독일에서 걸출한 아티스트가 많이 나왔다. 어떠한 양식도 강령도 방향도 지향하지 않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을 구현해 현존하는 최고의 동시대 미술가로 평가받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도 전쟁의 포화로 쑥대밭이 됐던 옛 동독 드레스덴 출신이다. 마침 서울에서 오늘날 독일을 무대로 활약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개최되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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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주기로 독일 소도시 카셀에서 열리는 현대미술전 도쿠멘타와 10년마다 찾아오는 공공 미술 축제인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동시에 펼쳐진 2017년. 이해에는 ‘그랜드 아트 투어’ 내지는 ‘문화 예술 기행’이라는 명목으로 독일을 위시해 유럽 일주를 감행한 이들이 꽤 많았다. 그 대열에 합류한 필자는 내친김에 크고 작은 독일의 여러 도시를 찾아다녔는데, 마침 85세 생일을 맞이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신작을 모은 전시를 그의 고향 드레스덴에서 감상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리히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작가 미상>에서 “예술만이 나치 이후 잃어버린 자유의 감각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극 중 인물(백남준과 더불어 ‘플럭서스’ 운동을 이끈 전위예술가 요제프 보이스를 모델로 삼은 캐릭터)의 대사가 나오는데, 격변기 속 몸부림과 성찰이 어려 있는 독일 작가들의 작품 세계는 ‘시대를 비추는 예술’을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리히터를 비롯해 게오르그 바셀리츠, 안젤름 키퍼 등 세기를 관통하는 거장들을 차치하더라도 독일 미술계의 풍경은 여전히 흥미로웠다. 국적을 막론하고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베를린 등지에서 이 시대를 호흡하고 고민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작가가 많은데, 국제적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듯한 느낌이다. 그 아쉬움을 달랠 만한 전시들이 서울 하늘 아래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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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 _갤러리바톤
‘예술의 섬’으로 불리는 일본 나오시마에는 ‘필수 코스’처럼 여겨지는 카페가 하나 있다. 착시 효과를 일으킬 정도로 현란한 줄무늬와 물방울무늬로 도배된 공간인데, 이 개성 만점 카페는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개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작품’이다. 그의 비엔날레 수상작도 비슷한 느낌의 카페였는데, 공통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함의 위장용 무늬에서 착안했다는 ‘대즐 카무플라주(dazzle camouflage, 위장 도색)’ 기법을 반영했다. 2년 전쯤에는 낙동강 하구에 자리 잡은 을숙도의 부산현대미술관에도 그의 카페가 들어섰다. 토비아스 레베르거는 ‘디자인 카페’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응용 예술 작품에 대한 보수적 경계심을 깨뜨렸다. 이렇듯 그는 조각-설치-건축, 미술-디자인, 예술-일상, 미학-기능 등 장르와 역할을 아우르는 이분법적인 경계 사이에서 ‘변화(transformation)’를 모색해온 작가다. 서울 한남동에 자리 잡은 갤러리바톤에서 진행 중인 <Truths that would be maddening without love>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가늠하고 시각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경험이다. 전형적인 ‘하얀색 입방체(white cube)’를 벗어난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된 전시 공간부터 흥미롭다. 푸르른 바다와 하늘이 펼쳐진 벽에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색과 형태, 결로 점철된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5개의 문이 계속 다른 공간으로 이끄는데, 문 위에는 공통적으로 ‘Something Else is Possible’이라는 문장이 퍼즐 조각처럼 새겨져 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세계, 가능성’ 등을 의미하는 ‘문’과 ‘창문’은 그에게 매력적인 소재라고. 그런데 자세히 보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향의 벽면에는 주로 풍경 등 자연적 감성이, 다시 나올 때 보이는 방향의 벽면에는 인상이 강한 동물이나 인물 등 대조적인 감성이 흐르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잔잔함-역동성의 대비도 있겠지만 일반적-개인적, 감성적-개념적 등의 다양한 변증법적 방식으로 읽힐 수 있어요.” 작가는 ‘문’ 자체에 담긴 함의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다름(otherness)’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며 자신의 일관된 주제 의식을 설명했다. 문을 다 통과하면 3D 프린팅 기술로 만든 앙증맞은 오브제들이 ‘재떨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나오고, 이는 작가 특유의 카페처럼 사이키델릭한 공간으로 마무리된다. 작품의 조합이 전시명으로 읽히는 공간도 따로 있는데, 여기서 길가 풍경을 바라보는 운치도 제법이다.

# 펠레스 엠파이어(Peles Empire) _바라캇 컨템포러리
루마니아 출신의 바르바라 볼프(Barbara Wolff)와 독일 작가 카타리나 스퇴버(Katharina Sto··ver)가 만나 듀오를 이루어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펠레스 엠파이어’. 이 독특한 이름은 친구이던 두 작가가 2005년 같이 방문한 루마니아의 고성 ‘펠레스’를 본뜬 것이다. 르네상스·바로크·고딕·아르데코 등 다양한 양식이 위계 없이 뒤섞여 있는, 다분히 ‘포스트모던’적인 성안의 방들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이처럼 다른 것들의 섞임에서 오는 긴장감을 작업의 원동력으로 삼고 ‘혼종성(hybridity)’을 주제로 다뤄온 이 듀오가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이 앞섰다. 3년 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그들의 작품을 꽤 인상적으로 접한 기억이 있어서다. 무너지는 성의 테라스 이미지를 담은 기울어진 8m 높이의 설치물은 겉으로는 우스꽝스럽게 웅장한 건축양식을 비꼬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아담한 ‘바(bar)’로 변모한다. 그곳을 찾는 동시대 작가들과 만나 대화를 시도한 ‘소통’과 ‘실험’의 장이었다. 이들은 베를린에서도 다른 작가들을 초대해 전시를 하는 공간을 꾸리는 등 비슷한 유형의 프로젝트를 계속해오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어떤 전시를 보여줄지 기대감이 솟았다. 더욱이 그들과 협업을 하게 된 서울 삼청동 갤러리 바라캇 컨템포러리는 유달리 층고가 높은 1층 내부 구조 덕분에 매력적인 전시 공간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작가들은 내한하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둘의 궁합은 성공적이었다. 작가들은 매끄러운 에폭시 재질의 살짝 얼룩덜룩한 갤러리 바닥을 재치 있게 활용했다. 갤러리 스태프가 바닥을 촬영해 A3 크기 용지로 출력한 후, 높다란 갤러리 벽면에 뒤덮듯이 붙여놓았다. 연한 갈색으로 똑같이 물들인 벽과 바닥에 그들의 그림과 조각 작품이 어우러진 광경은 꽤 근사한 시각적 희열을 선사한다. 이는 과거에 펠레스 성의 공주 방을 찍은 사진을 자신들의 아파트 거실 벽면에 붙여 재현한, 작가들이 즐겨 쓰는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 “3차원적 작품을 2차원 방식으로, 혹은 그 반대로 보여준다”고 자신들의 작업을 설명하는 이 듀오는 “서로 다른 차원(dimension)에 생기는 ‘해석’의 차이에 관심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이질적 조합에서 새로움을 창출하는 작업의 매력은 갤러리 벽에 걸린 ‘셀라돈’ 시리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오묘한 연녹색 노끈이 눈길을 끄는 이미지의 조합이 4cm 두께의 제스모나이트 위에 프린트된 이 평면 작품들은 고려청자를 부르는 영어 명칭 ‘셀라돈(celadon)’과 17세기 희극의 주인공으로 ‘이상향(arcadia)’를 추구한 목동 ‘셀라돈’에서 동시에 차용한 것으로, 역설적으로 완벽한 유토피아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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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정(Sen Chung) _OCI미술관
무심코 그린 듯한, 혹은 제멋대로 붓을 휘두른 듯한, 그래서 ‘미완성’이 아니냐는 얘기도 종종 듣는 그림. 하지만 특유의 노스탤지어 감성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안아주고 싶은, 보듬어주고 싶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하는 묘한 매력을 품은 그림. 독일 뒤셀도르프를 기반으로 서울을 오가면서 작업하는 한국인 작가 샌정의 작품에 대해 ‘팬’들은 이렇게 말한다. 회화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어떻든 간에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꾸준히 ‘캔버스’에 집중해온 그의 신작을 이번에는 갤러리가 아닌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자리한 OCI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VERY ART>라는 전시다(오는 5월 16일까지). 1층에서 3층까지 공간을 그의 흐릿한 그림들이 담백하게 채우고 있다. 그의 신작들은 더 흐릿해졌고, 실 몇 가닥을 풀어놓은 듯 보다 단순해졌으며, 한층 더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잔잔한 듯하지만 가까이서 한참 응시하고 있노라면, 파장 같은 것도 느껴진다. 이번 전시를 개최한 OCI미술관 김소라 큐레이터의 말을 빌리자면 “언뜻 모노톤 화면이 균질하게 정돈되어 있는 듯하지만, 물감의 두께감, 선의 갈라짐, 색의 충돌 등 회화적 요소들 때문에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미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긴장과 균열이 섬세하게 파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는 이 미묘한 긴장감을 ‘부유감’으로 표현한다. 감각과 사유가 서로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파고들다가 그 지난한 과정이 마침내 가라앉을 때, 캔버스 위에 침전한 사유가 그의 ‘그림’이 된다는 설명이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얘기지만, 그의 사유는 분명 내면 세계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듯하다. 한때 함축된 자연, 인물의 형상처럼 보이는 구상적인 요소를 녹이기도 했던 그의 작업 세계가 무채색 배경에 단순한 선과 면의 형태만 남은 추상으로 변모해온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그는 이번 전시를 ‘로맨틱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 늘 자신의 관심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18세기와 19세기 낭만주의와 연결되는 맥락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로맨티시즘’에 다가서는 자세로 작품에 임했기 때문이란다. 샌정의 로맨티시즘은 어째서 담백한 슬픔을 머금고 있는 걸까? “이번 신작들에는 ‘의도적인’ 단조로움 뒤로 기대하지 않았던 난해함이 의미심장하게 공존하는데, 이처럼 상반된 두 세계가 이런저런 감정과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명상적인 무드를 넘어 캔버스를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때때로 고적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요.” 역시 그다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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