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탐구, 빛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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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 2017

정리·글 이소영

수없이 반복되는 작업을 통해 여백의 미를 현대적 물성으로 재현해내는 자신만의 ‘입체 회화’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남춘모 작가. 부산시립미술관 김선희 관장이 내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회고전, 뉴욕과 파리의 개인전을 준비 중인 남 작가를 거창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만나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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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낸 남춘모 작가가 구불구불한 밭고랑에서 영감을 받은 한국적 선(線)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광목을 단단하게 굳혀 작은 조형물을 만들고, 이를 캔버스 위에 붙이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선을 입체적으로 표현해 빛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볼륨을 주는 것이다. 이는 건축적 형태의 추상화이면서, 드로잉이자 조각 작품이기도 하다.

김선희  국내외 미술 관계자와 수집가에게 포스트 단색화 작가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남춘모 작가의 작품과 단색화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남춘모
  단색화 작가들은 미술계 선배이시고, 저와는 시대 배경부터 다른 세대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학교에서 미술을 배우면서 단색화 작가의 작품을 많이 봤습니다. 단색화 전기 작가는 독재나 일제 치하의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정신이 있었고, 저는 개인적 감성을 조형적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생각해요.

김선희  1970년대 단색화 운동이 일어나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단색화 작가들도 각자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지요. 세계 시장에서 단색화가 호평받는 건 기쁜 일이지만, 다른 다양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주목받기를 기대합니다.
남춘모
  추사 김정희와 겸제 정선의 작품에서부터 우리나라 단색화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질과 정신을 연결하고, 수행하고 축적한다는 점에서는 제 작품과 단색화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시대 상황과 작업 방식은 전혀 다르니까요.

김선희  반복 작업을 통해 정화하고 수행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절에서 스님이 마당을 매일 빗자루로 청소하는 것은 더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훈련하고 정화하기 위해서지요. 이렇듯 젊은 작가들이 아무리 천재적이어도, 꾸준하고 부지런한 작가를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춘모
  다행히 어느 나라에서든 작업의 밀도가 있고, 수고가 엿보이면 인정해줍니다. 수없이 반복하고 주행하고 시간을 중첩하는 제 작업을 알아주는 미술 관계자들이 계셔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김선희  지금과 같은 부조 회화를 만든 것은 언제부터인지요? 어떤 평론가는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와 비교 분석을 하기도 했지요.
남춘모
  1990년대는 드로잉에 몰두했던 시기입니다. 우리나라 선대 작가들이 보여준 여백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본연의 선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현대의 물성으로 선대 작가들이 보여준 여백의 미를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작업실로 쓰던 폐교의 천장에 매단 꾸불꾸불한 선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을 보고 감탄했지요. 작품의 안과 밖을 모두 보여주고 싶어서 ㄷ(디귿) 자 형태의 작은 기둥을 이용했는데, 그 입체 형상 때문에 시간에 따라 생기는 그림자가 흥미로웠습니다. 처음에는 건축적 요소를 주요 모티브로 삼았지만, 회화에서 군더더기를 제외하고 입체화한 선 하나로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선희  남 작가의 작품은 입체 회화라고 불립니다. 작업 과정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남춘모
  광목을 잘라 사각형 각목에 고정하고 폴리코트(수지)를 바른 후 단단하게 굳힙니다. 바싹 마른 후 뜯어내면 ㄷ 자 형태의 작은 기둥이 완성됩니다. 이 볼록한 빔(beam)을 캔버스 위에 차곡차곡 붙이고 여러 번 채색하면 작품이 완성됩니다. 초창기에는 별도로 채색을 하지 않고 광목 자체의 색깔을 작품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투명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뒤에는 아크릴 판을 댔습니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 작품을 크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요즘 하고 있는 캔버스 작업은 크기도 키울 수 있고, 아크릴물감으로 여러 번 채색하기 때문에 회화성이 강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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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m16-71, 2016, Mixed Media on Canvas 160 x 120cm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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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최근 작품을 보니 원숙기에 접어들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직선으로 캔버스에 나열하던 작은 기둥의 형태가 곡선으로 변했고, 강렬한 색채가 돋보입니다. 화려한 오방색을 보니 평소 말수가 적은 작가의 내면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뜨거운지 깨닫게 됩니다.
남춘모
  요즘 캔버스 작업을 통해 회화성을 발휘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때로는 색채감각의 한계를 느끼기도 합니다.(웃음) 파란색, 흰색, 검은색, 빨간색, 노란색 등 단색을 주로 사용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 작품은 입체 회화이기 때문에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이지요. 숲속의 나뭇잎 색이 아침부터 밤까지 변하는 것처럼, 작품 색깔이 계속 변화합니다.

김선희  캔버스 위의 입체적 나열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한 계기를 설명해주시겠어요?
남춘모
  영양 지역의 고추와 담배 농사꾼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농작물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 땅에 검은 비닐을 덮었는데, 바람이 불면 비닐이 펄럭펄럭 휘날렸습니다. 얼마 전 고향에 다시 가서 보니 그런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더군요. 저의 새로운 곡선 작업은 이러한 어린 시절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골 마을의 구불구불한 밭고랑이 검은 무광택 비닐에 싸여 햇빛에 반짝이는 풍경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입체 회화의 시작을 이끌고, 최근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화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김선희  이전에 농부와 미술가가 비슷하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춘모
  네, 작가는 농부와 같습니다. 감상자는 지금 보고 있는 것 이전의 시간과 결실을 안겨준 작업에 쌓인 시간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미술가는 농부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작업합니다. 저 역시 요즘 농부들의 경운기 소리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작업실로 갑니다. 앞으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언제나 완벽하게 계산하며 작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 입체적 작품은 완성돼서 벽에 걸렸을 때, 빛의 변화와 만나 그림자까지 드리워져야 비로소 완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선희  남 작가의 작품은 최근 아트 파리에서 완판되고, 베를린의 안도 파인 갤러리 개인전에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해외에서 주목받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춘모
  처음 유럽 미술 시장을 노크한 것은 10여 년 전이었습니다. 서울에서는 지방대학 출신 작가를 인정해주지 않던 시기였기에, 제 근원을 찾고자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독일은 세계 표현주의 미술의 뿌리와 같은 곳이고, 뉴욕이나 파리에 거주하다 다시 독일로 가는 미술가도 여전히 많으니까요. 백남준 작가도 1963년에 독일 한스 마이어 갤러리에서 최초로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선 몇 개로 공간에 울림을 준 선대 작가들에게 물려받은 자부심을 갖고 독일에서 공정하게 작품을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김선희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남춘모
  유럽 활동이 늘어나면서 5년 전에는 쾰른에 스튜디오를 두었고, 작품을 본 미술 관계자와 컬렉터가 우리나라 아틀리에에도 계속 찾아오기 때문에 거창에 아틀리에를 새로 건축했습니다. 내년 1월에 열릴 대구미술관 전시 도록 서문도 쾰른의 루트비히 미술관 관장이 써줄 예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견 작가지만, 유럽에서 저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젊은 작가군으로 평가받습니다. 뉴욕과 파리의 개인전 일정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김선희  아, 그러고 보니 대구미술관 개인전 준비 때문에 아주 분주하겠군요.
남춘모
  미술관 전시는 작가에게 새로운 모티브가 됩니다. 갤러리 전시보다 규모가 크고, 공익적 도전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고전 형식으로 선보일 예정이며, 어디까지 기존 예술 세계를 확대할 수 있는지 증명하려고 합니다. 대중에게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제게 큰 영감을 준 밭고랑의 구불구불한 선과 검은 비닐을 씌운 풍경을 담은 비디오도 상영합니다.

남춘모는 일관성 있는 자세와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작품으로 드러나는 작가다. 반복적 탐구와 사색을 통해 인간 본연의 깊은 감수성을 수수하지만 아름답게 작품에 담아낸다. 구도자와 같은 남 작가의 다음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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