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축복, 론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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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 2012

에디터 고성연 | 도움말 안미영(와인 전문가)

물 맑고 수려한 계곡들로 수놓인 프랑스 남동부의 론 밸리. 따사로운 햇살의 축복을 유달리 많이 누려온 이 천혜의 와인 산지에서 빚어지는 감칠맛 빼어나고 묵직하며, 강렬한 레드 와인이 요즘 유난히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지난 10여 년에 걸쳐 거의 매해 뛰어난 빈티지를 거두는 행운까지 거머쥔 론 와인의 매력, 충분히 빠져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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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일조량이 많기로 유명한 론 계곡의 와인은 포도 품종에 있어서 북부와 남부에 따른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3 론 밸리의 대표적인 명산지로 통하는 에르미타주 지역. 중후한 장기 숙성형 와인이 일품이다.
4 남부 론의 대표적인 포도 품종인 그르나슈. 햇볕을 듬뿍 받고 튼실하게 영근 모양새가 탐스럽다.
5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전문인 대상 와인 박람회 ‘론 와인 디스커버리’에서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진행된다.
6 오크 통에 담겨 숙성되는 와인. 론 계곡은 묵직하고 감칠맛 나는 레드 와인으로 유명한데, 장기 숙성형 와인도 꽤 많다.
7, 8 론 북부의 주요 AOC인 콩드리외(Condrieu)와 코트 로티(Co^te-Ro^tie)의 아름다운 풍광.
9 2012년 상반기 ‘발레 뒤 론 와인 아틀리에’에서 선보인 ‘파프리카로 만든 라타투이를 곁들인 그릴 치킨’, ‘한국인이 좋아하는 식재료와 론 와인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마련된 이 와인 디너에서는 참신한 마리아주의 미학이 돋보였다. ⒸChristophe Grilhe′(1, 7, 8 사진)


“40년 전만 해도 론 밸리의 와인은 부르고뉴와 보르도의 레드 와인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런데 현재 이들 세 곳은 모두 대등한 위치에 올랐으며,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론 밸리가 세 지역 중 가격 대비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까다로운 뉴요커들이 줄지어 수강 신청을 하게 만든다는 스타 와인 강사 케빈 즈랠리(Kevin Zraly)의 베스트셀러 <와인 바이블(Windows on the World Complete Wine Course)>의 한 대목이다. 이처럼 찬사를 받은 론(Rho^ne) 와인은 즈랠리의 지적처럼 프랑스 와인을 이끌어온 쌍두마차로 대접받아온 부르고뉴와 보르도의 이름값에 밀려 자국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는 ‘저평가’되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은 판세가 좀 달라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지불하는 가격에 비해 보다 품질 좋은 제품을 선호하는 ‘실속형’ 소비자층이 점차 두터워지고 있는 데 따른 영향일까. 2010년부터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최대 와인 소비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론 와인 수입은 지난 5년간 200% 이상 늘어났다. 아시아 시장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한국은 2011년 한 해 동안 론 와인은 전년 대비 3.5배(hl, 헥토리터 기준)의 수입 증가율을 기록했고, 프랑스 와인(AOC급 기준) 중 2위 자리를 꿰찼다. 시장점유율로 보면 론 와인은 2010년 한 자릿수(7%)에서 2011년엔 15%로 뛰어오르는, 출중한 도약을 뽐낸 것이다. 이러한 상승 곡선을 굳이 부각시키지 않더라도, 원래 프랑스인들이 가장 즐겨 소비하는 와인의 하나라는 론 와인의 진면목은 그 배경을 살짝 들춰보기만 해도 흥미롭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론 계곡이 빚어내는 천혜의 풍미

부르고뉴 지방의 아래쪽, 그러니까 프랑스 남동부에 자리 잡은 론은 이 나라에서 랑그도크 루시용 다음으로 포도 재배 면적이 넓을 뿐만 아니라 생산량에서도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전통 깊은 와인 산지이다. 리옹(Lyon)과 아비뇽(Avignon) 사이에 흐르는 론 강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는 이 지역의 포도밭은 건조한 기후와 풍부한 일조량 등 와인 재배에 유리한 ‘알짜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물 맑고 자태 고운 골짜기들이 포진하고 있기에, 론 지역에서 빚는 와인은 발레 뒤 론(Valle′e du Rho^ne, 프랑스어로 ‘론 계곡’이라는 뜻) 와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론 밸리가 와인 산지로서의 물꼬를 본격적으로 튼 것은 지중해와 북유럽을 잇는 통로로 론 강을 이용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에 이어 로마인들이 포도 재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무려 2천 년여 전의 얘기다. 이어 14세기엔 불안정한 로마 정국을 피해 아비뇽으로 온 교황들의 지원으로 이곳 포도원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론 와인은 꾸준히 명성을 쌓아왔고, 1937년 ‘코트 뒤 론 AOC’(AOC 등급은 프랑스 정부가 와인과 농작물의 생산지를 규정하고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원산지 통제 명칭)가 탄생한 것을 계기로 프리미엄 와인으로서의 입지도 구축하게 됐다.

론 와인이라 하면 ‘레드’로 통한다. 그도 그럴 것이 론 밸리에서 생산되는 전체 와인 생산량의 90%가량이 레드 와인이다. 굳이 부르고뉴 와인과 비교하자면 감칠맛이 더 나고 묵직하며 알코올 도수도 높은, 꽤나 강력한 레드다. 이는 유난한 햇볕의 축복으로 강렬한 여름의 열기를 깊숙이 품은 토양 덕분인 것으로 풀이된다(햇볕을 많이 받을수록 포도에 당분이 많아지며, 그에 따라 알코올 도수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맛의 미학을 꿰뚫은 케빈 즈랠리는 자신의 저서 <와인 바이블>에서 “나는 소믈리에로 일할 때, 양갈비나 필레미뇽의 맛을 돋울 만한, 알코올 도수 높고 그윽한 레드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청을 받곤 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추천할 만한 와인은 론 와인”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비(非) 레드 와인 계열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타벨(Tavel)’이라고 불리는 로제 와인을 예로 들면 색깔은 분명히 장밋빛을 띠지만 다른 로제와 달리 대체로 드라이한 맛을 내는데, 나름 상당히 열렬한 애호가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극명하게 다른 색채를 지닌 북부와 남부의 와인

와인의 개성을 좌우하는 요소인 포도 품종을 논하려면, 먼저 남부와 북부의 확연한 차이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 곳이 론 지역이다. 북쪽의 포도밭은 강가를 따라 솟은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보다 폭넓게 펼쳐진 남쪽의 포도밭은 알프스와 중앙 산악 지대의 지맥까지 뻗어 있다. 북부는 대륙성 기후에 화강암과 편암질의 토양이고, 남부는 론 강을 따라 리옹 쪽으로 향하는 북풍 ‘미스트랄’이 부는 지중해성 기후와 석회암질의 토양이다. 이 때문에 포도 품종과 와인 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소비자의 다양한 입맛을 충족시킬 만큼 와인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의미도 된다. 북부 론은 ‘시라(Syrah)의 왕국’으로 통할 만큼 시라를 주품종으로 양조한 와인이 압도적인 지역이다. 강변에 좁게 자리한 포도밭의 지리적 특성상 북부 론의 와인 생산량은 많지 않은 편이지만, 최고의 포도밭에서는 보르도의 그랑 크뤼에 비견할 만큼 뛰어난 와인이 탄생한다. 묵직한 장기 숙성형 와인을 빚어내는 명산지 에르미타주(Hermitage)와 완숙한 포도로 강력한 와인을 빚어내는 코트 로티(Co^te -Ro^tie)가 대표적인 예다.

시라의 위세가 절대적인 북부 론과 대조적으로 남부 론은 ‘블렌딩의 예술’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다채로운 포도 품종을 거느리고 있다. 전반적으로 지중해성 기후이긴 하지만 북부에 비해 포도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지역별 기후가 세분화되고, 이에 따라 와인 스타일도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또 와인 양조에서도 많은 품종을 사용한다. 총 21가지로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품종을 사용하는 만큼 여러 가지 시도를 향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잠재력이 풍부한 와인 산지라고 볼 수 있다. 레드 와인은 그르나슈(Grenache), 무르베드르(Mourve`dre), 시라(Syrah), 생소(Cinsault), 화이트 와인은 루산(Roussanne), 마르산(Marsanne), 클레레트(Clairette) 등이 주로 쓰이는 품종이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매력으로 무장한 론 와인의 매력이 한국 음식과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는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오랜 전통에 바탕을 둔 고전적인 기품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블렌딩에 따른 자유분방한 멋까지 갖춘 론 와인의 급부상은 이러한 마리아주의 미학에 공감하는 국내 애호가들이 훨씬 더 많아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한식과 절묘한 궁합을 이루는 고전적이고도 자유분방한 매력

인터론(INTER RHO^NE, 론와인생산자협회)에서 2008년부터 개최해온 ‘발레 뒤 론 와인 아틀리에’는 한식을 위시한 다양한 음식과의 마리아주를 통해 ‘행복한 밥상’을 탐색한다는 맥락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식도락 캠페인이다. ‘음식과 와인’이라는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독특한 시각으로 참신하게 풀어내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지난 상반기 ‘한국인이 좋아하는 식재료와 론 와인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청양고추, 마늘, 미나리, 한우 등을 주재료로 활용한 요리와 함께 매칭한 ‘론 와인 디너’는 이 같은 도전이 돋보이는 흥미 만점의 정찬이었다. 프렌치 레스토랑 라빌드팡에서 마련된 이 와인 디너엔 친화력이 강한 가벼운 느낌의 레드 와인인 오르카 벙투와 초리조, 청양고추 등으로 간을 한 모시조개 요리의 만남으로 시작했다. 남성적인 느낌이 강한 남부 론의 와인 지공다스의 스파이시한 느낌이 마늘 특유의 강한 향을 씻어주는 듯한, 마늘 퓌레를 곁들인 송아지 췌장 요리, 상큼한 파프리카 향이 스며들어 있는 라타투이를 곁들인 닭고기와 시라의 개성을 잘 반영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크로즈 에르미타주의 궁합, 그리고 연근과 우엉 퓌레를 더해 자연을 머금은 느낌인 연한 한우 스테이크와 최적의 상태로 숙성된 명품 에르미타주의 기막힌 조화가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코스 요리까지, 그야말로 오감을 일깨운 신선한 마리아주의 향연이었다.

론 와인과 한국 음식의 어우러짐에 특별히 공을 들여온 인터론의 올리비에 르그랑(Olivier Legrand) 마케팅 총괄이사는 “한식에는 자연의 풍미를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재료가 많으므로 와인과 좋은 만남을 이룰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한식 마니아로 알려진 그는 “론 와인은 샐러드처럼 간단한 음식이나 순대와 족발 등 일상적인 음식과도 조화를 잘 이루지요. 와인 때문에 한식 재료의 가치가 더욱 잘 발휘될 수 있다고 봅니다”라며 한식과 론 와인의 하모니가 지닌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거듭 강조했다. 사실 개인의 입맛에 따라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와인과 음식의 결합에는 정답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물론 각각의 특성이 자아내는 맛의 조화가 때로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식생활을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최근 국내에서 눈여겨볼 만한 발레 뒤 론의 인기는 단지 마리아주의 장점뿐만 아니라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을 빠르고 쉽게 느낄 수 있게 하는 론 와인의 특징과 한국 시장의 역동성이 잘 맞아떨어진 데 따른 결과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제7회 한국 소믈리에 대회 1위 수상자인 고효석 소믈리에는 “론 와인은 한국인들의 성향이나 식생활과 잘 맞고 가격 대비 접근성이 좋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 기갈(E. Guigal), 엠 샤푸티에(M. Chapoutier) 등 론을 대표하는 와인들이 한국에서 큰 호응을 얻으며 성장했다”고 말했다.

유달리 축복받은 빈티지가 주는 풍성한 기대감

더구나 최근 론 와인의 빈티지는 축복 그 자체이므로 기대감이 무색해질 만한 여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지난 10여 년간 론 지역, 특히 남부 지역의 발레 뒤 론 와인은 거의 매해 뛰어난 빈티지를 누려오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그렇다면 가장 ‘앳된’ 2011년 빈티지는 어떨까? 전문가들은 론 와인의 자유분방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스타일을 맛볼 수 있을 것이란 의견을 내놓았다. 지난해 론 지역은 ‘여름 같은’ 봄 날씨와 ‘봄 같은’ 여름 날씨 등 이변적인 요소들이 계속된 기후를 맞이했고, 가을에 이르러서 매우 이상적인 날씨를 거쳤다. 포도알들이 최적의 상태로 영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수확하는 등 생산자들이 저마다의 노하우를 적용해 빚어낸 2011년 빈티지는 와인 메이커들 각자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첫 테이스팅 이래, 북부 론의 시라는 섬세한 풍미에 균형이 잘 잡힌 훌륭한 빈티지가, 남부 론은 풍부한 과실 아로마에 뛰어난 보디감이 더해져 장기 보관의 잠재력을 기대해볼 만한 빈티지가 예상된다는 평가가 나왔다고도 한다. 인터론의 필리프 펠라통(Philippe Pellaton) 부회장은 “코트 뒤 론 2011년 빈티지는 잘 익은 과일 향, 신선도와 부드러운 타닌을 지녀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다”라는 의견을 전해왔다. 론 계곡을 누빈 뒤 ‘해마다 빈티지를 거듭하면서 포도 송이들은 토양이 지닌 풍미를 묘사한다’고 한 어느 작가의 읊조림처럼 론 와인은 속살을 드러낼수록 보여줄 게 더 많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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