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문화의 유쾌한 반란_OZ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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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여미영(디자인 스튜디오 D3 대표)

거장 피카소, 세기의 시인 장 콕토, 마드무아젤 샤넬이 함께 만든 발레 <푸른 기차>는 처음 작품을 올린 1924년을 넘어 2013년 광저우에서 열린 <문화 샤넬> 전시에서 새로운 가치를 입었다. 예술은 세월을 지나도 살아 있고, 현대의 새로운 예술로 추앙받는 패션 역시 예술과 함께 더 큰 자유를 얻어 살아 숨 쉰다. 광저우에서 만난 예술과 샤넬의 새로운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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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미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세운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압제자 사보나롤라를 몰아낸 시민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다비드상. 이 기념비적인 두 작품이 서로 거울에 비친 듯이 발을 맞대고 서 있다. 어둠에 대항해 횃불을 쥔 손을 뻗어 어둠을 밝히는 여신과 돌을 들고 거인 장수 골리앗에게 대항할 준비를 하는 용맹한 청년의 모습은 시대와 장소, 성별을 뛰어넘어 어쩐지 닮았다. 이 흥미로운 벽화는 두 나라의 인권과 시민 정신의 승리를 상징하는 문화적 원형을 통해 다르면서도 닮은 국가 정신을 표현한 스트리트 아트다. 오즈모(Ozmo)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탈리아의 스트리트 아티스트 조나타 제시(Gionata Gesi)의 작품이다. 2014년 주미 이탈리아 대사가 미국 마이애미 윈우드 예술지구(Wynwood Art District)에 미국과 이탈리아의 친선과 수교를 기념하는 벽화를 의뢰했고, 이 제안을 흔쾌히 승낙한 오즈모는 가로 30m, 높이 6m의 거대한 벽에 이 인물들을 담아냈다. 좀 더 유심히 작품을 감상하면 그림 속에 담긴 자유의 여신상이 그의 벽화와 묘한 대비를 이루며 예술계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미국의 독립 1백 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친선의 메시지로 제작한 이 귀한 여신상을 완성하려고 양국은 장장 10여 년에 걸쳐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고, 프랑스의 대표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토목 기사 구스타브 에펠과 협업했다. 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한 이 거대한 작품은 결국 독립 1백10주년이 되어서야 뉴욕 허드슨 강 입구 리버티 섬에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로부터 1백28년 뒤, 사뭇 대조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이탈리아의 문화 사절 역할을 맡은 오즈모는 마이애미행 알이탈리아 항공 여객기 짐칸에 스프레이와 페인트만 단출하게 싣고 대서양을 건너왔고, 같은 작품의 설치(?)를 무사히 마쳤다. 전체 스케치에 소요된 기간은 고작 8일, 의뢰 시점으로부터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영리한 아티스트는 양국의 독립과 자유를 표현하는 대작을 활용해 편견을 벗어난 예술의 독립과 자유, 스트리트 아트의 승리를 위트 있게 그려냈다. 횃불과 돌 대신 스프레이 통을 든 채로 말이다. 어느덧 국가의 친선 예술이 조각을 비롯한 전통성 있는 순수예술에서 소위 하위문화, 저변 문화를 대표하는 스트리트 아트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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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오즈모는 아이콘화하거나 낙서화된 형태로 스트리트 아트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키스 해링이나 장 미셸 바스키아 같은 ‘전설’들과는 물론,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영국의 뱅크시, 현대적이며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이 담긴 프랑스의 제이알 등 동년배의 유명 스트리트 아트 작가들과도 현격히 차별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대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작가의 메시지를 해석할 수 없어 관람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과 생명, 아름다움과 추함, 고전과 현대, 비극과 해학 등 대조적인 요소를 배치해 관람자의 시선과 경험, 지식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동일한 관람자조차 감정과 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감상과 다른 해석을 발견하기도 한다. 타 작가들에 비해 다양한 세대에 걸쳐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밝힌 작품 전략은 ‘모호함’과 ‘상징성’으로 압축된다. 특히 소재 선정에서 타로, 신화에 담긴 전통적인 소재가 현대적인 소재와 뒤엉켜 있는 점은 ‘오즈모표’ 스트리트 아트의 큰 특징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카라바조의 회화 속 성인(聖人)과 고전 인물들에서 왕관을 쓴 미스 월드와 총을 든 나체의 여군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성격이 다양한 대상이 복잡한 군상을 이루고 있음에도 훌륭한 구도가 안정감을 주면서 공간에 풍부한 스토리를 부여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밀라노 예술의 거리 브레라 지역에 위치한 오즈모의 작업실에서 작가와 함께 만난 매니저 시모나 나바(Simona Nava)는 처음 인터넷에서 그의 작품을 본 순간 이 단어를 떠올렸다고 회상했다. ‘기계를 타고 온 신’ 이라는 의미인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사용하던 극작술(劇作術)로, 극의 긴박한 국면에서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 주인공의 문제를 해결하고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을 의미한다. 철학 박사 출신인 그녀는 로마 시대 이후 분리돼버린 예술과 신성성의 맥락을 놀랍게도 스트리트 아티스트의 작품에서 발견했고, 이에 즉시 매료돼 일면식조차 없던 오즈모에게 같이 일하자 청했다고 말했다. 오즈모가 전통적인 예술적 원형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뭘까? 이탈리아에서도 특히 전통이 잘 보전된 토스카나 지방의 피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르네상스 발상지인 피렌체의 브레라 예술대학에서 순수 회화를 전공한 그의 배경에 기인한다.
“사실 전 어린 시절 만화가를 꿈꿨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반대하셨고, 그 타협점으로 유서 깊은 미대에 진학하기로 했죠. 학교에서 배운 전통적인 구도와 고전 회화의 사실적 표현 기법이 제 작품에 영향을 줬고요.” 특히 그처럼 토스카나 출신인 르네상스 아티스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술과 과학을 넘나드는 발상은 고전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기존 예술의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과감한 시도에 대한 도전 의식에 불을 지폈다.
벽과 스프레이만 있으면 OK, ‘나만의 미술관’을 찾아 열정을 분출하다
그의 영웅 다빈치가 남긴 규모 큰 벽화 역시 캔버스를 넘어 ‘벽’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오즈모는 1997년 대학 졸업 후 현실적인 대안으로 광고 회사를 직장으로 택했는데, 그 주요 동기는 ‘보다 큰’ 벽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광고와 커뮤니케이션 담당으로 4년간 일한 그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스튜디오의 성격상 훌륭한 컨템퍼러리 작품을 가까이에서 접하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에게는 작가로 데뷔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예술적인 열정을 분출할 타개책을 찾았지만 젊고 무명인 그의 작품을 환영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유년 시절 친구들과 장난 삼아 기차에 스프레이로 사인을 남기던 그라피티를 떠올렸다. 바로 이거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벽과 스프레이만 있으면 어디든 그의 미술관이 됐다. 미술관과 달리 관계자의 인맥, 심사, 대관 비용, 시간 등이 필요 없었고 순식간에 대중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으며, 일상의 공간이기에 보다 많은 이들과 호흡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짜릿한 해방감을 만끽하며 남몰래 그라피티를 남기던 그는 점차 광고에서 표현할 수 없는 터부시되는 주제, 죽음, 종교 등을 다루는 회화적이고 정교한 스트리트 아트를 펼치며 본격적으로 아티스트로 작품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초반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공공 기물 파괴로 베를린에서 경찰에게 잡히기도 하고,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스트리트 아트계에서 상당히 낯선 주제인 고전을 소재로 삼은 그의 작품은 점차 두각을 나타냈고,오즈모는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유서 깊은 현대미술관 PAC(Padiglione d’Arte Contemporanea), 900 미술관(Museo del 900 di Milano),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 등에서 초청전을 여는 파격적인 기회를 갖게 됐다. 이제 그는 이탈리아를 넘어 미국, 영국, 독일 등 전 세계에서 러브콜을 한 몸에 받는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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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트 아트 열풍과 냉혹한 작가적 현실

8년 전, 겨우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영국 스트리트 아티스트 뱅크시의 벽화가 연이어 1백만달러 이상을 호가하며 영국과 미국의 미술 경매에서 낙찰됐다. 이후 스트리트 아트에 대한 예술계의 관심이 높아졌지만, 정작 그 세계에 몸담고 있는 작가들의 현실은 아직 냉랭하기만 하다. 일부 작가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고, 나머지는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타 아티스트 뱅크시조차 경매에 나오거나 갤러리에서 판매된 작품은 ‘벽’의 주인이 소유를 주장해 판매한 경우가 대다수였고, 정작 그가 직접 캔버스에 그려 미국 센트럴 파크 앞에서 개당 60달러에 판매했을 때는 대중의 차가운 외면을 받는 아이러니도 발생했다(물론 익명으로 판매한 탓이 크지만!).
예술과 반달리즘 사이에서 작품 가치 평가 기준의 모호함과 법적 소유권 문제, 작가에 대한 대우, 작품 보수와 유지 등 스트리트 아트는 역사가 짧은 만큼 아직까지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오즈모 역시 그런 사회의 이중적인 잣대와 예술적 지원의 한계를 안타깝게 여긴다. “스트리트 아트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난 18년간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저와 함께 시작했던 많은 작가들이 이 길을 포기했어요. 작품이 알려지면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에서 전시와 구매를 하고, 기관에서 공공 미술 등 요청을 받아 수입을 올릴 수도 있지만, 기회가 너무 적어 다른 직업에 종사한 채 취미로만 작업하다가 결국 포기하는 경우가 많죠.” 또 스트리트 아트를 반사회적 행동이라며 무조건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유명 미술관에서도 초청받아 전시를 하지만 미술관마다 스트리트 아티스트를 대하는 기준이 천차만별이다. “큐레이터가 스트리트 아티스트에게 미술관에 페인트칠을 하는 도색공 이하의 작업료를 제시하는 일도 있어요. 또 전시 이후 작품들은 보관은커녕 덧칠해서 지워버리기 일쑤죠.”

을(乙)의 지친 일상을 위로하며 대중을 찾아가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전진하는 것이 아티스트의 숙명이라 말한다.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과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같은 어려움에 도전해오지 않았냐고 물으면서. 이러한 어려움이 경쟁적인 타 영역 아티스트들과 달리 동료를 서로 격려하고 돕는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오즈모 역시 인터뷰 중 ‘나’라는 표현보다는 타 아티스트들을 포함시킨 ‘우리’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대중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스트리트 아트만의 친근한 매력도 그가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는 이유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예술계의 기득권층이 아닌 일반 대중이나 소외 계층, 갑(甲)이 아닌 을(乙)과 소통하며 그들의 예술적인 경험을 충족시키는 민주적인 예술이라는 점을 뿌듯하게 여긴다. 미술관을 찾기 힘든 이들이 거주하는 문화 소외 지역이나 서민적인 지역에 파고들어 예술적인 감성과 스토리를 불어넣고 즐거움을 전하며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다. 덕분에 그들은 다른 아티스트들이 받지 못한 특별 대우를 받기도 한다.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은 현장에서 장기간 작업하다 보니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때면 큐레이터보다도 미술관을 운영하는 핵심 인물(!)인 경비원, 엔지니어, 스태프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소통할 기회를 갖는다. 오만한 미술 관계자들에 대해 불만과 편견을 가진 직원들조차 현장에서 자신들 이상으로 땀 흘리며 고생하는 아티스트의 모습에 어느덧 무장해제되어 팬이 되고, 타 미술관의 또 다른 실세를 소개해준다고. 덕분에 오즈모는 밀라노의 미술관 관계자들에게 VIP로 환대를 받으며 값비싼 미술관을 ‘프리 패스’하고 있다.
스트리트 아티스트로서는 드물게 주류 예술과 문화계에서 새롭게 조명받으며 많은 관심을 받는 오즈모. 그는 갑이 알 수 없는 을의 세계에서 더 맹렬하게 환대받으며 문화 사절로서 활약하는 현대판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현재 사회적인 관심과 투자 비용이 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주류 예술계에서는 무시당하는 스트리트 아트. 그러나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는 오즈모 같은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은 편협한 예술계의 관행과 높은 콧대에 지쳐 예술의 즐거움을 잃고 헤매는 대중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을들의 슈퍼스타’로 성장하고 있다. 몇몇 아티스트들의 튀는 활약상만으로 스트리트 아트를 지나가는 유행이자 거품으로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대중 친화적이고 매력적인 예술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다. 그 열기가 용암처럼 아주 낮고 깊은 곳에서 서서히, 그러나 뜨겁고 끈끈히 달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문화 형식과 질서를 갖춘 그라피티와 스트리트 아트

1960년대 중·후반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등장한 스트리트 아트.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스트리트 아트에 대해서는 예술 장르와 불법 낙서라는 양극의 평가가 공존한다. 명칭에서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그라피티(graffiti)와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를 혼용하고 있지만 작가들은 나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문자와 이름에 집중하는 작품을 그라피티, 이를 넘어선 회화적 작품, 설치 작업을 가미한 작품, 혹은 그와 그라피티를 포함한 예술 작업을 스트리트 아트로 엄격히 구분 짓는 것이다. 문자로 구성되는 그라피티는 작가의 이름을 주 소재로 삼는데, 형식적인 요소에 따라 한 가지 색으로 재빠르게 표현하는 ‘태그(tag)’, 태그의 크기를 키우고 색감을 다양화한 ‘스로위(throwie)’, 혹은 ‘스로업(throw-up)’, 질과 기술적인 완성도가 보다 높은 정교하고 실험적인 ‘피스(piece)’로 나눠 칭한다. 보다 예술적인 형식을 따른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등장하고 큐레이터의 관심을 끌고자 이 형식을 차용한 가난한 아티스트들이 유입되면서 예술성이 높아졌다. 1980년대에는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 현대 예술의 슈퍼스타를 배출하면서 예술계에서 재평가되며 대중적 지지층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렀다. 스트리트 아트를 연구해온 애너 바츠와베크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 세계에 입문한 작가들의 의도와 표현 방식은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예술관을 공유한다고 지적했다. 바로 ‘작품은 보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 팔리거나 인정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이 봐줘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언뜻 무질서하게 여겨지는 이 예술 세계에도 엄연히 그들만의 질서와 형식이 존재한다. 오히려 타 예술보다 엄격한 면도 있다.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은 자부심이 높고 독창성을 중요하게 여겨, 작품적 가치가 떨어지거나 예술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이들을 작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작가가 개발한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은 위조로 간주해 ‘바이팅(biting)’이라 부르며 경멸한다. 벽과 기차, 공공 기물 등 공간을 선점하는 데도 그들 사이의 예절과 언어가 존재해 공간을 보다 나은 작품이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자정 기능이 작동된다. 예를 들어 이미 그려진 태그가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경우에는 그 위에 이름과 작품을 덧쓰거나 태그해 자신이 앞선 작가보다 우월함을 표시하고, 다른 작가의 작품에 감명을 받거나 작품적 가치를 인정하는 경우 그 옆에 서명하거나 의견을 남겨 존경과 찬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작가들은 본명이 아닌 작품을 위한 닉네임을 사용한다. 마치 인터넷상에서 네티즌이 아이디를 사용하듯 자신의 존재와 저작을 표현하면서도 익명성 뒤에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이다. 벽을 대화창으로, 작품을 언어로 삼아 세상과 소통하는 스트리트 아트는 양방향적 소통을 지향하는 오늘의 디지털 문화와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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