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y Capell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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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6, 2013

에디터 고성연(런던 현지 취재)

칸트는 “패션 안에서 바보가 되는 게 패션 밖에서 바보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했을 정도로 철학자로서는 드물게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런던을 무대로 떠오르고 있는 알리 카펠리노는 ‘패션 안의 바보’를 가득 품고 있는 듯한 가방 디자이너다. ‘허당’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작업에서는 진지한 장인 같은 오라가 배어나며, 풍파가 적다고 할 수 없는 시련을 겪어서인지 나름의 진지한 삶의 철학도 지닌 그녀가 사이클을 즐길 때 메는 ‘알리 카펠리노 표’ 가방을 보면 분명 칸트도 반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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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4백만 명이 훌쩍 넘을 정도로 많은 방문객을 끌어모은다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유수의 해외 갤러리가 그렇듯 이곳에서도 미술관만큼이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디자인 숍의 인기가 높다. 새로운 전시회가 열리면 으레 그와 관련된 ‘주제’나 해당 ‘아티스트’를 모티브로 삼아 선보이는 ‘한정판’ 디자인 컬렉션도 이 쇼핑 공간의 볼거리다. 예컨대 호안 미로의 환상적인 문양과 색채를 반영한 스카프나 마크 로스코의 우아한 추상 작품을 곱게 프린트한 에코 백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때마다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컬렉션 사이에서도 벌써 6년 넘게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은근한 ‘스테디셀러’가 있으니, 알리 카펠리노(Ally Capellino)라는 브랜드가 이 위풍당당한 현대미술관만을 위해 제작하는 ‘테이트 컬렉션’이다. 이 컬렉션은 전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약간은 투박한 느낌이 묻어나는 톡톡한 캔버스 소재에 살짝살짝 가죽을 덧댄 멜빵 가방(satchel)과 필통, 앞치마, 간단한 미술 도구를 넣고 둘둘 말 수 있는 ‘아티스트 롤’ 등으로 이뤄진 부담 없는 캔버스 컬렉션이다. 가볍고 튼튼한 편인 데다가 깔끔한 디자인까지 곁들인 이 컬렉션은 이 도시의 수많은 아트, 디자인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온 관람객들에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특히 세일이라도 할라치면 런던의 멋쟁이들 중 알 만한 이들은 재빠르게 집어 갈 태세를 갖춘다. 런던에 두 군데밖에 없는 알리 카펠리노 매장의 ‘AO’ 라인 등 비슷한 제품 가격대가 적게는 2배, 많게는 3배가량 비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정한 팬이라면 이에 만족하지 않고 왁스 코팅 처리한 특제 캔버스와 이탈리아산 가죽까지 사용해 훨씬 더 고급스럽고 다면적인 매력을 주는 가방에 눈독을 들이겠지만 말이다.
일상의 미를 품은 테이트 컬렉션, ‘장수 상품’으로 자리매김하다
“세계 어디를 가든 우리의 캔버스 라인을 들고 있는 이들을 봤죠. 노신사도 있고, 10대 청소년도 있어요. 여권과 지갑 등을 간단히 담을 수 있는 여행용 캔버스 백 같은 아이템은 여성뿐 아니라 누구나 애용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특히 테이트 컬렉션은 가격 경쟁력도 있고요. 2006년에 테이트와 컬래버레이션을 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테이트 갤러리를 위한 ‘우리만의’ 디자인을 하겠다는 건 우리 마케팅 담당자의 제안이었지요. 특정 전시회를 겨냥한 디자인이 아닌 덕분에 ‘수명’이 길어진 셈이죠. 예를 들자면 피카소 전시회를 위한 디자인 컬렉션을 의뢰받아 피카소 필통, 피카소 쿠션 등을 만든다면 길어봤자 6개월이면 물건을 빼야 하잖아요.” 런던 이스트엔드의 쇼디치에 위치한 매장에서 직접 마주한 알리 카펠리노는 테이트 컬렉션의 장수 비결을 이렇게 분석하며 상당히 뿌듯해했다. 그렇다. 전시회가 새로 들어서면 매장에서 철수하는 한시적인 상품이 아니면서도 고정 팬을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한다면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당연히 굉장한 ‘플러스’ 요인이다. 실제로 알리 카펠리노의 테이트 컬렉션은 색감이나 약간의 디테일에만 변화를 줌으로써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영리한 결정이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었단다. “단지 특정한 전시회나 아티스트를 콘셉트로 하는 디자인을 하는 건 우리 스타일하고는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냥 결과적으로 비즈니스 판단을 잘한 게 되어버린 것이죠(웃음).” 놀랍지는 않다. 그녀는 영악함과는 거리가 먼,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순수한 소녀다움이 묻어나면서도 뭐든 꾸밈없이 털어놓으며 웃어넘기는 초연한 여유로움이 흐르는 인물이다. 나름 차분하고 진지하면서도 시시때때로 장난스러운 눈빛을 발산한다. 영국인 특유의 자조적인 유머마저도 유쾌하기 이를 데 없게 만들기에,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무장해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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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당’의 매력, 브랜드의 명예가 되다
사실 필자는 오래전 알리 카펠리노의 가죽 배낭을 보고 반해 팬이 되었는데,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매력적인 브랜드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계통이 아닐까 추측했다. 다분히 이탈리아 분위기를 풍기는 카펠리노(Capellino)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브랜드명조차도 그녀의 ‘허당’스러운 면모를 반영한 실수의 산물이다. 그녀의 본명은 앨리슨 로이드(Alison Lloyd). 런던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더블린, 요크셔 등지를 거치며 살다가 미들섹스대학에 입학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당시 동창이었던 남자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인 피오루치(Fiorucci)의 요청으로 매장의 윈도 디스플레이를 위한 모자를 디자인하게 됐다. “뭔가 이름이 필요했는데, 이탈리아어로 카펠리노는 ‘작은 모자’라는 뜻일 거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사용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중간에 철자가 하나 빠졌더군요. ” 그들의 의도대로 ‘모자’라는 뜻을 나타내려면 ‘Cappellino’가 됐어야 했던 것이다. 나중에 딴 이름으로 바꿔야 했나 싶었지만, 다들 ‘괜찮다’고, ‘너무 늦었다’고 해서 그냥 놔뒀단다. 지금은 가방, 소품 등과 같은 액세서리를 주로 다루지만, 원래는 의상을 디자인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항상 옷을 만들어 입었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팔기까지 하는 ‘예비 디자이너’였다. 잘 팔렸냐는 질문에 그녀는 “오, 그럼요. 돈을 잘 벌었죠. 집에 당시의 장부가 있는데, 예를 들면 바지 한 벌에 1.5파운드라고 적어놓은 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이러한 회상이 스스로도 즐거운지 줄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대학에서 패션과 섬유를 전공하고 난 다음인 1980년대 초에 모자 디자인을 함께 했던 남자 친구인 조노 플랫과 손잡고 여성복 패션 디자이너로 정식 데뷔했다. 당시 모스크바 올림픽을 소재로 삼아 러시아풍 일러스트레이션 등을 사용한 5벌의 의상을 발표했는데, 이 작은 컬렉션이 호응을 얻으면서 정식으로 브랜드를 론칭하게 된 것이다. “사실 액세서리를 돋보이게 할 장식적인 요소로 의상을 활용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언론이나 고객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죠.”
시련을 뒤로하고 우연히 파고든 새로운 영역, 백 디자인
이렇게 해서 이 ‘커플’은 남성복, 아동복 라인까지 아우르는 패션 사업을 거의 20년 가까이  함께 꾸려나갔다. 알리 카펠리노의 현재 스타일을 보면 유추할 수 있듯이 편안하고 질 좋은 소재에 오래 입어도 질리지 않는 특유의 디자인은 그들에게 꽤나 충성스러운 고객층을 안겨다주었다. 유럽, 일본 등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시기적절한 변화를 시도하지 못해서일까? 1999년에 심한 경영난에 부딪치게 됐다. “저는 경영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충돌이 싹트고 있었어요. 분명 당시 패션 업계에는 1980년대와는 다른 흐름이 있었고, 저도 좀 더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지향하기 시작했는데, 제 파트너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파격적이지도 않았는데…. 사실 제가 다리가 3개 달린 바지를 디자인하는 식의 충격적인 스타일은 아니잖아요(웃음). 그런데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자 서로 각자의 방식을 더 강하게 주장했던 것 같아요.” 결국 그들은 파산했고, 집도 은행에 넘겨야 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인생의 동반자로서도 안타까운 결별을 고했다. 둘 사이에는 어린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강도 높은 시련을 통해 해방감도 얻은 것 같다고 술회했다. “당시에는 정말로 심하게 힘들었죠. 특히 그러한 파국에 이르는 동안에는요. 하지만 막상 터질 일들이 터지자 일종의 안도감이 찾아왔어요. 저는 운 좋게 디자인 컨설턴트로 일하게 됐는데, 상당히 즐거웠어요. 여자아이들을 위한 유니폼도 디자인했는데, 참 신선한 경험이었죠.” 그녀는 또 공공 기관을 위한 디자인 컨설팅도 맡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흥미롭게 일하다가 담당 임원이 바뀌면서 자신이 디자인 자체에 전적으로 관여할 수 없게 되자 다른 데 시선을 돌렸다. 가방 디자인이었다. “사실 지루해서 재봉틀 하나로 만들어본 거예요. 하지만 가방은 시도해본 적이 없고, 가죽도 다룰 줄 몰라서 고생을 좀 했죠. 그런데 재미있게도 옷을 만들던 방식처럼 가방을 대하니까 제 작품의 모양새가 좀 달랐던 거예요. 당시만 해도 각을 잡기 위해 판지 등을 사용해 꽤 딱딱한 느낌의 가방이 많았고 접착제도 많이 사용했는데, 저는 옷을 디자인하듯 솔기를 꿰매 뒤집었거든요. 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의 디자인이 나온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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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과의 협력, 또 다른 도약의 기회를 일궈내다
솔직히 좀 어설프게 시작한 가방 디자인이 호응을 얻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기가 제법 높았고, 가죽을 만지는 데 흥미를 느꼈기에 그녀는 아예 사업을 시작했다. 늘 그랬듯이 열정과 ‘촉’이 이끄는 대로. 물론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토대를 쌓아 올려야 했기에 찬찬히 해나갔다. 알리 카펠리노의 플래그십 스토어인 쇼디치의 매장과 온라인 구매를 할 수 있는 웹사이트(www.allycapellino.co.uk)가 구축된 것은 2005년이 되어서였다. 알리 카펠리노라는 브랜드가 은근한 입소문을 타고 지지자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음에도 사업 규모가 별로 크지 않은 점이 못내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정감 있는 디자인, 빈티지 느낌을 주는 가죽의 오묘한 색감과 약간의 재미를 더해주는 장식…. 이렇듯 패셔너블한 가죽 제품도 인기지만 간편히 메고 다닐 수 있는 사이클링 백 같은 경우에는 가격이 저렴하지 않은데도 알리 카펠리노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백에 친근한 이름을 부여하는데, 한쪽 어깨에 멜 수 있는 ‘프랭크(Frank)’는 그레이, 블렉, 레드, 브라운 등 4개를 소유할 정도로 애정이 깊다. 왁스 코팅된 몸체의 밑부분에 가죽을 댄 이 가볍고 편리하면서도 멋스러운 가방은 알리처럼 사이클을 사랑하는 런더너들이 탐내는 상품이다. 이 브랜드의 또 다른 자랑은 애플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출시한, 맥에어나 아이패드를 담을 수 있는 컴퓨터 가방이다. “테이트 컬렉션을 이끌었던 마케팅 담당자가 있는데, 그녀가 애플에 전화를 걸어 제안했어요. 당시로서는 패션 브랜드가 컴퓨터 가방을 디자인한 건 거의 처음이라고 봐야 할 거예요. 아이디어가 괜찮았는지 애플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의 두꺼운 계약서를 검토하라고 보내줬는데, 변호사에게 의뢰하자니 그 비용이 더 나올 것 같아 그냥 사인해버렸죠(웃음). 결과적으로 히트 상품이 됐고요.” 유럽 시장을 겨냥한 애플 백이 나온 건 2008년. 나일론 소재의 멋없는 랩톱 가방들이 판을 치고 있던 때라 나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제는 패션 소품처럼 근사한 디자인이 흔해져 미국이나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려면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니 풍파를 겪고 재기한 인물답게 마냥 ‘허당스럽지’ 않고 튼실한 심지가 느껴졌다.
‘허허실실’ 마인드가 사랑스러운 그녀의 비전
테이트와 애플과의 잇따른 컬래버레이션 성공, 그리고 팬층이 점점 두꺼워지는 가죽 라인과 캔버스 라인의 견고한 성장. 유럽 시장의 기나긴 경기 침체 속에서도 그녀의 액세서리 사업은 순항해오고 있다. 2011년에는 쇼디치 매장을 새 단장하고 런던의 유서 깊은 명품 백화점인 리버티백화점에 ‘숍인숍’ 형식으로 입점을 성사시켰으며, 노팅힐 지역에 아름다운 2호 매장도 차렸다. 해외 시장에도 직영 매장은 아직 없지만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러브콜’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인생의 중반에 쓰라린 경험을 겪었기에, 그리고 한 번도 굉장한 야심가인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확장’에 신중하다.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시스템을 더 갖출 필요는 있지만 향후 계획을 묻는다면, 당장 뭔가를 하고 싶은지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게 ‘나만의 럭셔리’ 라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새로운 걸 시도하면서 우리 브랜드만의 제조 시설도 제대로 갖추고 싶다는 소망은 있어요. 실제로 기계 설비를 사들이고 있지요. 그래야 디자인을 제어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에게 성공이란 스스로 뿌듯하고 행복하게 느끼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만약 인정까지 받게 된다면 그건 ‘덤’이라고 말하는 알리 카펠리노. 어째서 그녀의 성장한 ‘아이들’이 그토록 모친과 가깝게 지내고 ‘엄마의 디자인 작업’을 자신의 일처럼 사랑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큼 이 여인은 참으로 따스하고 유쾌하며, 긍정적인 캐릭터가 내재된 듯한 느낌을 풍긴다(딸은 사진가, 아들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게다가 아직도 그녀의 사이클 가방이 잘 어울리는 귀여움까지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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