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o Milano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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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3, 2015

에디터 고성연(밀라노 현지 취재)

20세기 초에 런던, 파리와 자웅을 겨루며 글로벌 메트로폴리스로서의 입지를 열심히 다지고 있던 밀라노에서는  ‘만국박람회’라 불리는 큰 행사가 열렸다. 진한 에스프레소에 우유 거품을 풍성하게 얹은 카푸치노라는 존재가 세상에 처음으로 널리 공개된 1906년의 엑스포다. 그로부터 무려 1백9년 만인 2015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세련미 뚝뚝 떨어지는 이 도시는 다시 엑스포의 무대가 됐다. 지난 5월 1일 개막해 오는 10월 말까지 6개월간의 대장정을 펼치는 2015년 밀라노 엑스포의 주제는 ‘지구 식량 공급, 생명의 에너지(Feeding the Planet, Energy for Life)’.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볼거리와 고민할 거리를 동시에 안겨주는 밀라노 엑스포 현장을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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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박람회의 시초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긴 세월이 흐른 만큼 월드 엑스포의 모양새는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각국에서 각종 공산품과 공예품을 내놓으며 산업 경쟁력을 자랑하던 행사였다면, 이제는 인류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전 지구적 과제’에 대한 진취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도 다분히 문화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신나는 축제의 장으로 꾸며진다. 일단 저마다의 특색이 묻어나는 파빌리온(pavilion, 국가관) 디자인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뿐만 아니라 공연, 전시, 강연 등 다채로운 부대 행사가 흥을 돋운다. 이번 밀라노 엑스포 주제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식문화를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에 꽤나 잘 어울린다. 물론 먹을거리가 주제라고 해서 그냥 ‘잘 먹고 잘 살자’는 내용을 다룰 리는 없다. 즐겁고도 올바른 먹을거리를 지향하는 건강한 식문화와 첨단 기술을 등에 업은 산업 차원의 고민, 해마다 세계 식량의 1/3에 해당하는 13억 톤의 음식물이 버려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되짚어보며 낭비를 지양하는 건전한 식습관, 아직 지구촌의 많은 곳에서 비일비재한 굶주림을 없애기 위한 창의적인 해법 등 폭넓고 깊이 있는 ‘사색의 장’이 전개되고 있다. 요즘 인류의 ‘제대로 된’, 그리고 ‘지속 가능한’ 먹을거리는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범지구적으로 ‘핫한’ 주제인 만큼 세인의 관심도 뜨겁다.

정돈된 로마식 길에 흩뿌려진 자연미, 싱그럽고 소박한 전시장 풍경

밀라노는 이미 패션, 산업 디자인, 건축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상업 도시지만 이번 엑스포에서는 특히나 야심을 불태우는 눈치다. 한 세기 남짓 만에 다시 개최하는 행사인 데다 좀처럼 경기 침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럽 대륙의 자존심을 대신해서라도 옹골지게 치러내겠다는 의도가 버티고 있는 듯하다. 국제박람회사무국(BIE)에서 공인하는 엑스포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5년마다 개최돼 ‘문화 월드컵’으로 통하는 등록 엑스포(registered expo), 그리고 등록 엑스포 사이에 더 작은 규모로 열리는 인정 엑스포(recognized expo)다. ‘큰 엑스포’와 ‘작은 엑스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2010년 역대 최다인 1백89개 참가국과 7천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동원한 상하이에 이어 밀라노에서 ‘큰 엑스포’가 열리게 된 것이다(1993년 여수, 2012년 대전에서 열린 엑스포는 둘 다 ‘작은 엑스포’였고, 현재 부산에서 유치를 준비 중인 2030 엑스포가 ‘큰 엑스포’다). 성장 가도를 달리는 인구 대국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1백40여 개국이 참가한 이번 밀라노 엑스포는 총 2천만 명의 관람객, 50조원의 경제 효과를 예상치로 잡아놓은 채 나름 쏠쏠한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개막 전부터 조직위의 부정·부패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반대 시위가 열리는 등 잡음이 있어서인지 밀라노 현지에는 다소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개막식이 연기되는 등 엉성한 면모는 아쉬웠지만 그래도 막상 뚜껑을 열고 나니, 엑스포답게 볼거리는 풍부했다. 일단 전시장이 로마의 도시처럼 세로로 길게 뻗은 ‘데쿠마누스(decumanus)’라는 긴 길과 이와 교차되는 ‘카르도(cardo)’를 주축으로 한 직선형이라 보기에 시원한 느낌을 자아낼뿐더러 길 찾기도 편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정돈된 느낌으로 늘어서 있는 각국의 파빌리온 디자인이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하기보다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건물 겉면을 녹색 풀로 장식하는 등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를 낸 경우가 눈에 많이 띄었다는 것이다. 행사의 백미로 꼽히는 파빌리온이지만 엑스포를 역량 겨루기가 아니라 문화적인 공유와 진지한 성찰을 꾀하는 장으로 삼자는 ‘성숙해진’ 취지에 맞게 설계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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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메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자부심 묻어나는 파빌리온
음식은 무엇보다 오늘날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그래서 매우 강력한 문화 상품이기도 하다. 20세기 후반부터 ‘슬로 푸드’, ‘로컬 푸드’ 등 일상의 식문화를 둘러싼 의식 있는 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기술, 아트, 디자인 등 다양한 방면으로 음식을 주제로 한 창의적인 행보가 이어지면서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물리적인 환경의 제약을 안고 있는 엑스포장에서, 그것도 매일같이 아침부터 밤까지 대단위로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는 상황에서 그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오감을 만족시키기란 만만치 않은 과제다. 55개 단독 국가관이 들어선 만큼 각국의 다채로운 먹을거리가 가득한 모습은 상상으로는 진풍경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시장 내에서 주로 스크린으로 구경도 하고 설명도 들은 다음, 따로 마련된 식공간에서 혀를 달래는 수순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지구의 미래를 염려하며 식문화에 대한 사유를 촉구하는 장대한 메시지가 정작 어두워지고 나서도 마음껏 음식을 접할 수 있는 엑스포 행사장의 풍경과는 어쩐지 좀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각국이 펼친 기술과 아이디어의 대결은 볼만하다. 누구보다 정성을 쏟았을 주최국 이탈리아는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과 브랜드를 ‘길거리 시장’처럼 모아놓은 식당관, 그리고 국가관 파빌리온을 따로 설치했는데, 규모도 규모지만 디자인부터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씨실과 날실의 조화 속에 니트를 걸친 듯하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두른 듯하기도 한 건물 외벽이 감탄을 자아내는데, 스모그를 흡수하는 시멘트로 만들었다고 한다. 파빌리온 내부 역시 ‘이탈리아답다’는 찬사가 나올 만하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가져왔다는 ‘수확의 여신’ 데메테르 조각상이 놓여 있고, 바위틈에 처박힌 여인의 모습이 인상적인 세계적인 아티스트 바네사 비크로포트의 설치 작품이 그와 대조를 이루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건네는 듯하다. 이탈리아관에서는 3층에 걸쳐 각각 기술(workmanship), 아름다움(beauty), 그리고 미래(future)의 힘을 주제로 스토리를 풀어내면서 근사한 프로젝션 이미지와 사운드, 냄새까지 동원한 ‘종합예술’을 선보인다. 이탈리아관 옆에 있는 아레나 호수에 설치된 ‘생명의 나무’가 화룡점정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로마 캄피톨리오 박물관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이 첨단 나무는 낮에는 음악과 함께 ‘물쇼’를 선보이고, 해가 지면 황홀한 조명과 영상으로 어두움을 수놓는다. 미식가의 나라로 치자면 원조 격인 프랑스관 역시 인기 만점이다. 나무 뼈대를 활용해 국토를 형상화했다는 프랑스 파빌리온은 자국 식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발현하듯 구조상 ‘열린 공간’을 지향하면서 전체를 레스토랑처럼 꾸며놓았으며, 낙농 대국답게 과일, 채소, 유제품 등 다양한 먹을거리를 ‘실물’로 보여주면서 ‘풍요로운 시장’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러한 풍요로움을 배경으로 할수록 인구가 도시에 밀집되는 현상 때문에 발생한 식량 위기를 대조적으로 짚으면서 이를 위한 대안적 생산 방식에 대한 고민의 흔적 역시 전시장에 반영했다.
체험으로 맛까지 살린 독일과 브라질관, 그리고 싱거운 G2의 대결
내로라하는 미식 대국인 이탈리아와 프랑스에는 아무래도 브랜드 프리미엄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브랜드 파워로 밀리는 일부 국가관의 홍보가 더더욱 흥미롭다. 소시지와 맥주, 그리고 고기 요리 정도가 연상되는 독일과 브라질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 둘 다 축구 강국인데, 역동성이 넘치는 체험 경제의 미학을 잘 살렸다. 브라질 파빌리온은 입구에서부터 즐거움이 샘솟는 듯하다. 커다란 그물을 설치해 놀이동산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풍기기 때문이다. 다들 발밑을 조심스레 살피면서도 미소를 가득 품고 걸어 다니는가 하면, 그물을 타고 노는 아이들도 있고, 아예 한쪽에 길게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는 관람객들도 눈에 띄었다. 세계적인 농업 생산국인 브라질의 식문화와 산업을 소개하는 입구일 뿐만 아니라 놀이터이자 휴식처이기도 한 것이다. ‘생각의 들판(Field of Ideas)’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독일 파빌리온은 실제로 함께 만들어나가는 전시라고 할 만큼 ‘참여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일단 전시관에 입장하는 관람객은 모두 골판지로 된 ‘시드 보드(seed board)’를 받는데, 이는 단순한 종이 판이 아니라 조명 아래 갖다 대고 기울이면 그 위에 이미지와 영상 등 각종 정보가 뜨는 인터랙티브 도구다(언어는 영어, 독어, 이탈리어 등 다양한 버전으로 선택 가능). 또 채소 등 음식 모형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저울 역할도 한다. 독일관에 가면 이 종이 판이 마지막으로 일종의 ‘악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Be(e) Active’라는 쇼인데, 2명의 비제이(BeeJ)가 나와 목소리와 손, 그리고 시드 보드를 활용해 무대를 이끌어나가면 천장에 달려 있는 움직이는 스크린에 독일의 식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자신의 보드로 박자를 맞추며 화답하는 관객과 아티스트가 한데 어우러지는 이 콘서트는 어쩌면 독일관 체험을 ‘전율’로 끝내줄지도 모르겠다. ‘이게 바로 체험 경제의 진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때쯤, 독일관을 담당하는 공보관 틸 데이닝거(Till Deininger)의 설명이 귀에 쏙 들어왔다. “공연을 하는 아티스트들도 그렇고 전시관 영상에 등장하는 농부, 유통업자들은 모두 ‘스타’가 아닙니다. 식생활이라는 주제답게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행사가 되기를 바랐고, 그래서 그런 취지에 맞는 이들을 찾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죠. 독일은 4년 동안이나 이번 엑스포를 준비했는데, 기업 후원도 받지 않았어요.”  반면 세계경제를 호령하는 G2의 전시관은 언뜻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내실에서는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등장해 홍보하는 영상을 볼 수 있고 햄버거 같은 자국을 대표하는 ‘종목’을 맛볼 수 있는 푸드 트럭을 10여 대 동원했다. 중국관은 커다란 정원을 파빌리온 앞에 설치하고 내부는 ‘보리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인 LED 발광체 2만 개를 활용한 설치물로 단장하는 등 규모에서는 ‘대국’다운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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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트의 진수를 맛볼 수 있지만 체험의 묘미는 부족한 한국관

‘한식, 미래의 음식’이라는 타이틀을 선택한 한국관은 엑스포장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가관 중에서 단연 눈에 띈다.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파빌리온 디자인이 깔끔하고 세련된 편이다. 1층에는 CJ푸드빌의 한식 브랜드 비비고에서 운영하는 한식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고, 2층에 위치한 전시관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조화, 발효, 저장 등 한식의 특징적인 개념을 다루는 데 집중했다. 다른 국가관에 비해 스크린으로 도배하기보다는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콘텐츠에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 묻어난다. 특히 미디어 아트를 감각적으로 잘 활용했다. 로봇 팔이 2개의 스크린을 움직여 펼치는 영상쇼는 관람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었다. 3백65개 옹기 뚜껑에서 꽃이 피고 김치로 변모하면서 발효의 시간을 표현한 미디어 아트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개념적이라서 어렵다’, ‘시각적으로는 근사하나 군침을 돌게 하지는 못한다’라는 쓴소리도 듣고 있다. 아트 차원에서는 수준이 높지만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 걸음마 단계인 한식의 묘미를 전달하는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체험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예컨대 심장 소리로 생명을 표현했다는 높이 3m에 이르는 대형 옹기는 시각적으로는 강렬할지는 모르지만 그 의도에 감탄하거나 즐거운 공감을 하기는 힘들다. 한식의 우수함만 개념적으로 강조하기보다는 음식 자체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해야 할 단계가 아닐까.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관은 전시관 밖에는 알록달록한 쌀자루를, 안에는 스시, 우동 등 자국을 대표하는 음식 모형을 얄밉도록 예쁘게 포장해 선보였고, 오감을 자극하는 다양한 영상으로도 일본의 식문화와 자연을 마음껏 뽐낸다. 전시가 끝나면 절로 일식을 먹고픈 충동을 일으킨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이렇듯 시각적 효과로 입맛을 돋우는 데 성공했지만 정찬 메뉴가 1백유로를 훌쩍 넘을 정도로 심하게 비싼 메뉴는 일본관의 흠으로 여겨진다. 아무리 프리미엄 이미지를 누리고 있는 일식이라지만 유럽에서도 ‘미식의 대중화’가 큰 흐름을 타고 있는 현 추세에서, 그것도 대중이 모여드는 엑스포장에서 내놓는 음식의 가격대로는 ‘무리수’라는 지적이다(맛깔스럽게 현지화된 데다 가격이 적당히 ‘착한’ 한식은 갈수록 호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오늘날 식문화 개혁 운동은 비싼 음식을 많이 먹는 게 아니라 맛과 가격의 조화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계까지 고려하는 ‘이기적이지 않은 탐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밀라노 엑스포는 놀랄 정도로 다채로운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food for thought)’를 주는 행사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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