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트인 푸른 바다와 해안선을 따라 촘촘히 들어선 고층 건물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부산. 늘 활기 넘치는 항구도시지만, 지난 5월 말에는 좀 더 특별했다. 국내 상반기 최대 아트 페어 ‘아트부산 2019’와 더불어 문화 예술 행사가 풍성하게 펼쳐졌기 때문. 아트부산이 열린 BEXCO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 수만 6만3천여 명. 작품 거래가 상업적 흥행의 온도만큼 폭발적이지 못했다는 일각의 목소리도 있지만,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맥락에서 여러모로 의미 있는 축제였다.
Projects) 부스 전경. 사진 제공: 아트부산.
을 볼 수 있는 작가들의 전시를 열었다.
망미동으로 아예 터전을 옮긴 갤러리 메이의 전시 공간. 개관전으로 백아트와 공동 기획해 30대 초반의 젊은 미국 작가 조너선 카셀러(Jonathan Casella)와 한국 중견 작가 박영하의 2인
전을 열었다.
올해 8회를 맞은 아트부산(Art Busan)은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2012년 첫회에 2만 명 수준(7개국 64개 화랑)이었는데, 올해는 17개국 1백64개 갤러리가 참가했으며, 6만 명을 훌쩍 넘는 관람객을 동원했다. 특히 이번에 부스를 차린 58개의 해외 갤러리 중에는 아트 바젤에 참가한 유럽 화랑이 포함돼 단순한 수적 증가가 아님을 보여준다. 베를린의 소시에테(Société)와 쾨니히 갤러리(KÖnig Galerie), 페레즈 프로젝트(Peres Projects), 그리고 파리와 뉴욕 등에 전시 공간을 둔 알민 레슈(Almine Rech), 네 곳이다. 또 아트 바젤 홍콩의 ‘인카운터스(Encounters)’처럼 개별 작가의 설치 작품을 소개하는 ‘프로젝트(Projects)’ 섹션을 올해 처음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나이지리아계 영국 거장인 잉카 쇼니바레 CBE(Yinka Shonibare CBE)의 식민지 국가의 문화적 혼성과 역사 의식을 기반으로 한 조각 작품. 프로방스 지역의 전통 천을 활용해 회화의 구조적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을 담은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의 설치 작업과 인간의 움직임과 정적인 사물의 관계성을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안드레아스 에미니우스(Andreas Emenius) 등을 등장시켜 상업적 기능만이 아니라 동시대 이슈를 제시하는 역할도 놓치지 않은 점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올해의 아트부산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페어’로 인정받은 데에는 미술 관계자를 비롯한 국내외 컬렉터, 그리고 상대적으로 주머니 사정이 덜 넉넉한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방문객을 포용한 ‘콘텐츠의 다채로움’이 한몫했다.
SNS 시대, 소유가 아닌 경험으로 즐기는 미술
어느 갤러리의 부스 한가운데 이색적인 플라워 숍이 들어섰다. ‘롱롱타임플라워’라고 명명한 일러스트 종이 꽃 20여 가지가 놓여 있는데, 단돈 5천원이면 꽃 한 송이를 살 수 있다. 국내 최초의 윈도페인터,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등 수식어가 다양한 나난 작가의 작업이다. 그녀의 ‘시들지 않는’ 종이 꽃다발 프로젝트는 10, 20대의 발길을 끌면서 SNS 최고 인기 부스로 등극했다. 1세대 쇼핑몰 CEO이자 파워 인플루언서로 SNS상에서 팬층이 두꺼운 강희재와의 협업도 눈에 띄었다. 자신만의 색이 있는 컬렉션으로 꾸민 <강희재: 명랑한 수집생활>이란 제목의 특별전은 역시 소통 방식이 남달랐다. 여타 갤러리라면 대표작이 걸렸을 메인 월을 핑크색으로 칠하고, 그곳에 디자인 의자를 곁들인 ‘#Photozone’을 마련해 사람들이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도 올해 아트부산 현장에는 SNS를 통해 자신의 취향과 독특한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스폿이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비싼 작품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지인들과 나들이 삼아 아트 페어를 즐기는 경험을 하도록 뒷받침하는 아트부산의 전략은 고가 작품에 치중하는 상업 논리로는 손해일 수도 있지만, 소유보다는 경험이 중요해진 문화 소비 트렌드를 반영한다고 하겠다.
현대미술 풍경 속으로 들어온
스트리트 감성의 크리에이티브 그룹
올해 아트부산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벡스코 전시장을 벗어난 도심에서 소위 ‘크리에이티브 그룹’으로 일컫는 이들이 펼쳐낸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롭고 동시대적인 풍경이었다. 과거 힙합이나 스트리트 문화에서 방향성이 같은 이들이 모여 팀으로 활동했던 크루(crew) 문화가 최근 예술계로 서서히 확장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아트부산 기간에 영화의전당에서 전시를 치른 WTFM(What the Fun Man)은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한 크리에이티브 그룹. 이들은 이번 전시에서 의자와 매트리스, 조명, 토이 등 일상의 가구와 오브제가 해체와 재조합, 낡은 낙서와 다채로운 그래피티의 흔적을 통해 본래의 쓰임과 형태의 굴레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움과 해방의 정서를 내뿜었다.
젊은 크리에이티브 그룹이 지닌 자유로운 에너지와 서브컬처의 조화는 국가와 인종, 문화, 언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감성을 충전하는 커뮤니티로 확장한다. 그 가운데 파우와우(Pow! Wow!)는 전 세계 1백 여명의 아티스트, 뮤지션, 포토그래퍼 등으로 이뤄진 커뮤니티로 벽화와 그래피티 기반의 설치 작품을 주로 한다. 파우와우 코리아는 아트부산 2019 특별전으로 비둘기를 그리는 화가로 유명한 벨기에 아델 르노(Adele Renault)를 비롯해 제프 그레스(Jeff Gress), 수트맨(Suitman) 등 유수 작가들이 가담한 벽화 설치 작업을 영도 흰여울 문화마을에서 진행했다. 지역에 보다 문화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창출하기 위해 서브컬처를 현대미술 풍경 안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전달할 것인지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사례였다.
젊은 감각과 참신한 도전 속에 새롭게 싹트는 아트 신
부산의 아트 신이 한층 풍부해졌다. 지난해 을숙도에 부산현대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국내 메이저 화랑인 국제갤러리 부산점이 망미동의 복합 문화 단지 F1963에 둥지를 튼 것. 올해는 서울에서 부산 망미동으로 아예 터전을 옮긴 갤러리 메이의 행보도 이목을 끈다. 복합 문화 공간을 지향하는 갤러리 메이는 20~40대 국내외 젊은 작가의 참신하고 개성 있는 전시로 지역 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계획이다. 가나아트 부산, 아트부산 사옥을 중심으로 소규모 갤러리, 창작 공간, 카페 등이 들어서는 망미동 일대는 새로운 ‘아트 지구’가 될 조짐도 보인다. 사실 아트 페어는 속성상 참가 갤러리가 해마다 들고 나오는 작품의 결이 비슷하므로 보여주는 방식이나 분위기로 차별화하지 않으면 관람객 입장에서는 싫증이 날 수도 있다. 진중한 동시대 담론도 좋지만, 미술 소비에 대한 저변이 넓어지는 트렌드를 반영해 모두가 즐기는 축제로서 면모를 갖춰나가는 아트부산의 소통 방식은 나름 영민한 선택으로 보인다.
[ART+CULTURE ′19 SUMMER SPE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