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의 시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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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05, 2026

글 고성연(밀라노 현지 취재)

시간을 품은 밀라노의 역사 공간
이탈리아 건축·디자인계의 대부 조 폰티(Gio Ponti, 1891~1979)는 “건축은 이탈리아인만의 소명은 아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에게 그것은 천직이다”라고 말했다. 삶과 문화가 머무는 공간으로 건축을 바라본 그의 시선은 밀라노의 오래된 저택에서 여전히 확인된다. 시대의 취향과 기억, 장인 정신이 축적된 이곳들은 귀족의 팔라초에서 현대의 문화 공간까지 새로운 의미를 얻으며 살아가는 도시의 유산이다. 밀라노의 역사적 저택을 걷는 일은 건축이 아닌 그곳에 깃든 삶과 예술, 시간을 만나는 여정이며, 과거의 공간은 오늘의 감각과 연결되어 미래의 문화적 가치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것이 밀라노의 저택이 품은 시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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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제오 폴디 페촐리(Museo Poldi Pezzoli)
수집가의 시간이 머무는 팔라초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 라 스칼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뮤제오 폴디 페촐리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방문자를 이끈다. 피에로 델 폴라이올로(Piero del Pollaiolo, 1443~1496)의 대표작 ‘젊은 여인의 초상’ 속 섬세한 옆얼굴은 오늘날에도 이곳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여인의 윤곽을 따라 흐르는 선은 관람객의 발걸음을 이끄는 현대적인 초대장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폴디 페촐리 미술관의 매력은 하나의 걸작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곳은 19세기 밀라노 귀족 잔 자코모 폴디 페촐리가 평생 모은 예술품과 자신의 저택을 시민에게 남기며 탄생한 하우스 뮤지엄이다. 회화뿐 아니라 조각, 가구, 보석, 도자, 직물, 무기와 갑옷에 이르는 방대한 컬렉션은 각각의 방과 어우러져 한 수집가의 취향과 시대의 미감을 보여준다. 내부를 걷다 보면 화려한 거울과 섬세한 장식, 작품과 함께 놓인 가구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끈다. 특히 황금의 방(Salone Dorato)을 비롯한 공간에서는 르네상스 회화와 장식 요소가 하나의 풍경처럼 어우러진다. 작품은 벽에 걸린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라, 한때 누군가가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폴디 페촐리 미술관이 특별한 것은 컬렉션과 건축, 생활의 기억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개인의 집은 한 수집가의 취향을 넘어 도시의 문화유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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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다치오네 루이지 로바티(Fondazione Luigi Rovati)
고대와 현대가 만나는 문화 공간


팬데믹 이전에만 밀라노를 방문했던 문화 예술 애호가라면, 폰다치오네 루이지 로바티는 가장 반가운 발견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19세기 팔라초는 2022년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고대 에트루리아 문명의 유물과 현대미술을 함께 선보이는 이곳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면서 오늘날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밀라노의 새로운 얼굴이다.

마리오 쿠치넬라 아키텍츠가 설계한 확장 공간의 중심은 지하 전시 공간이다. 부드러운 회색빛 석재인 피에트라 세레나로 마감한 공간은 곡선과 층위가 어우러져 고대의 방에 들어선 듯한 인상을 준다. 또 납골함과 오브제에 사용된 테라코타, 트라버틴 등 천연 재료의 질감은 고대 유물과 현대 건축 사이에 시간의 층위를 만든다. 반면 주층(piano nobile)은 팔라초의 역사적 뼈대를 간직하면서도 전혀 다른 감각을 보여준다. 목재 장식, 금빛 문, 대리석 벽난로와 거울 등 기존 저택의 요소는 그대로 살아 있지만, 방마다 다른 색채와 전시 구성은 공간에 새로운 생명력을 더한다. 루이지 온타니 줄리오 파올리니, 앤디 워홀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자리한 각각의 방은 컬렉션과 조화를 이루며, 건축과 작품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아니라 함께 완성된다. 폰다치오네 루이지 로바티는 역사 건축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건축과 예술, 연구와 교육을 연결하는 문화 플랫폼이다. 고대 에트루리아의 유물부터 현대미술, 그리고 이를 담아내는 팔라초까지,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이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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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네키 캄필리오(Villa Necchi Campiglio)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집


밀라노 중심부의 조용한 거리 안쪽, 풍성한 녹음 속에 자리한 빌라 네키 캄필리오는 1930년대 밀라노 상류층의 생활 방식과 미감을 간직한 공간이다. 팔라초와는 다른 성격의 주거 건축이지만, 한 시대의 삶과 예술적 취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밀라노를 대표하는 하우스 뮤지엄으로 자리한다. 건축가 피에로 포르탈루피가 네키 자매와 안젤로 캄필리오를 위해 설계한 이 빌라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근대 주거 공간이었다. 넓은 창과 선명한 구조, 정원과 이어지는 공간,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는 사적인 삶과 사교 문화, 휴식이 공존하던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여름철 짙은 초록으로 물든 빌라의 외관과 아름다운 정원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아이 엠 러브>에 등장하며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 빌라는 화면 속 이미지보다 실제 방문했을 때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네키 가문의 생활공간은 시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후 더해진 컬렉션은 공간에 예술적 깊이를 배가한다. 알리에기로와 에밀리에타 데 미켈리(Alighiero ed Emilietta de’ Micheli) 컬렉션과 클라우디아 잔 페라리(Claudia Gian Ferrari) 컬렉션을 통해 티에폴로, 카날레토, 시로니, 데 키리코 등 작가들의 작품이 자리한다. 이 빌라는 집이라는 장소가 어떻게 한 시대의 문화와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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